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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4

고려시대 서희가 거란과의 외교 담판에서 주장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서희가 외교 담판을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 역사 교과서에도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가 거란족을 물러가게 했었던 주장과 근거들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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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0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는 고려전기 장흥진 등에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외교가이다. 942년(태조 25)에 태어나 998년(목종 1)에 사망했다. 96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두루 관직을 거쳐 최고직에 이르렀다. 972년 직접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십수 년 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993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물리쳤고, 이 담판에서의 약속을 토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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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라고 하니

    서희는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하 하고 평향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거란의 동경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있는데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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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고려인데, 현재 거란이 옛 고구려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다. 여진이 길목을 막고 있으므로 거란(요)과 수교하는 게 어렵다 여진족을 몰아낼 수 있게 해주고, 강동6주를 확보한다면 거란과 수교하겠다 라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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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희가 영문(營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하고는 동서(東西)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의 지역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아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는 기운이 매우 강개하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사실을 정리하여 아뢰었다. 거란의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해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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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고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나라에 들어가니 이는 침해가 아니고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영토 안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조빙을 당연히 할것이다 라고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함을 밝혔으며 ,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여진족 평정 문제까지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와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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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룬 고려 태조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발해의 유⋅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 하류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렀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한편 거란은 요를 건국한 이후 발해 유⋅이민이 압록강 유역에 세운 정안국을 정벌하고, 그 여세를 몰아 993년 10월 동경 유수 소손녕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서희가 강경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때 거란이 평안남도 안융진을 공격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하자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거란의 태도에서 화해 가능성을 엿본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당시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외교 관계를 회복하여 송을 정벌하는 데 전념코자 하였습니다. 둘째, 거란은 옛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여 그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며,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의 옛 영토 일부를 되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란의 주장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워 고구려의 옛 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오히려 서희는 거란이 동경으로 삼고 있는 요양이 고구려의 땅이었으므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거란과 외교 관계가 성립하지 못한 이유는 여진의 방해 때문이라며, 만일 여진을 내쫓고 압록강 유역의 땅에 성을 쌓아 거란과 도로를 만들면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서희의 주장을 거란 왕이 받아들여 고려와 거란 양국은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협정 결과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280리 지역, 즉 강동 6주를 고려에 넘겨주는 대신 형식적이나마 고려가 거란에 항복하여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덕분에 거란은 송과 전쟁을 치를 경우 고려가 후방에서 기습할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종이 서희로 하여금 강동 6주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도록 하여,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고구려 옛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인접한 군사⋅교통 요충지를 확보하였습니다. 훗날 거란과의 2⋅3차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 전략적인 요새를 확보한 것입니다. 또한 여진과 거란의 통로를 차단하여 여진에 대한 회유와 견제에 유리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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