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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3

강감찬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요즘에 tv에서 강감찬에 대한 드라마가 나오던데 강감찬 장군은 그시대에 어떤 업적을 남겼나요? 강감찬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간략하게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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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이 누구인지가 궁금하군요.

    강감찬 장군은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하며 성종2년(983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 때 나이가 36세로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1010년(현종 1)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으며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중추사에 올랐다가 곧바로 이부상서가 되었고, 현종 9년(1018)에는 서경유수와 내사문하평장사가 되었습니다. 현종 즉위 전까지는 중앙 정계에 그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승진하면서 문하시중 다음 가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고 이후 죽기 직전에는 문하시중직까지 받았다고합니다. 또한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했기에 늦게 출세하고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1019년(현종 10) 거란의 제3차 침공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으며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전,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섬멸전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공이 끝난 1020년(현종 11)에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데,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1번만 출근토록 명령했다고하니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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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777
    나무77723.12.03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고려 성종 3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한 문관입니다.

    거란의 고려 2차 침입때에도 나주로 피난할것을 주창하여 사직을 보호하였고, 3차 침입때는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였습니다.

    고려의 구국의 영웅이자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명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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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살았던 인물로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입니다. 우리나라의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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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948년 12월 22일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조인 강여청이 시픙군으로 이주해 금주의 호족이 되었고, 983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 예부시랑이 됩니다.

    1010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을 침공,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에 나가 막게 하나 패했고,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해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합니다. 하공진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났고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갑니다.

    1011년 국자제주가 되고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기, 중추원사, 이부상서 등을 역임, 1018년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 서경유수는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018년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 이때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만 8천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 군을 격파, 흥화진 전투에서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해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합니다. 요나라군 10만명중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고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나와 금화팔지를 머리에 꽂아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습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 고려와 요나라 사이 평화적 국교가 성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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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신입니다. 983년(성종 3)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1010년(현종 1)에 강조정변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유배길에 살해했으며 현종을 옹립한 것을 빌미로 거란은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합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했으나 크게 패하고 맙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항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강감찬은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전략상 일시 후퇴를 주장하며 현종에게 피신할 것을 권합니다. 왕은 나주까지 피신하였으나 사직은 지키게 됩니다. 이듬해에 국자제주가 되고 1018년(현종 9)에는 경관직인 내시사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합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히 지방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을 맡게 된 것은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1818년(현종 9)에 고려 현종이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았다고 소배압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강감찬은 홍화진의 강 상류의 물을 막고 있다가 요나라 군사들이 도하할 때 막아둔 강물을 풀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군사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요나라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와 신은현에서 헙공하여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여 살아 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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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983년(성종 3 문과 장원 급제하여 문관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거란의 2차 침입시(1010) 현종을 피난을 건의하여 사직을 보호하고, 이후 공로을 인정받아 문하평장사와 서경 유수를 제수받았으며, 3차 침입시(1018)에는 현종이 상원수로 제수하여군사 20만을 이끌고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격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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