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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 ⠀23.03.29

정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관동별곡을 읽고 있는데, 관동별곡을 정철이라는 사람이 지었더라고요. 아무래도 고전시가이다 보니 작가의 생애를 알면 관동별곡을 읽을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질문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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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동별곡은 정철이라는 사람이 지은 작품입니다. 정철(鄭澈, 丁喆)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1504년(명종 6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1565년(명종 17년)에 서울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철은 문인으로서 많은 저작을 남겨, 특히 관동지방의 풍속과 문화를 담은 관동별곡으로 유명합니다. 관동별곡은 조선 후기의 지리산수도사상과 관련된 지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관동 지방의 풍속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로, 조선 후기의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철은 관동별곡 이외에도, 시집인 정철집(鄭澈集)을 비롯해 옥톡, 역경 등 많은 저작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조선 후기의 문화와 문학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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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철은 1536년 12월 18일 권력의 중시부에 있던 집안의 자녀로 한성부에서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사이의 4남 3녀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누나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었을 정도로 궈력과 친밀한 집안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명종과 정철은 궁궐에서 함께 뛰어다니며 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대부터 가문이 기울었는데, 을사사화로 계림군이 사망했는데 정철의 가문이 계림군과도 연관되어있던지라 정철의 친형은 곤장을 맞다 죽었고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와 파벌들의 당쟁에 휘말려 계속해서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으며 그런 와중에 정여립의 난에서 선조의 부탁으로 위관이라는 수사 책임자로 활약했고 이것이 피해를 입은 동인에게 악독안 힌간으로 평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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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철(程澈, 1536년 ~ 1593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으로, 문학, 역사, 지리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인물입니다. 정약용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문인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정철은 고려 말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정으로 어렸을 때 부산으로 이주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흥미를 보이며 석간(石鑑) 밑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경상북도 구미, 대구 등에서 봉사하면서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정철의 문학적 창작물로는 그의 대표작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이 있습니다. '관동별곡'은 전국적으로 유행한 민요인 '별안간'의 가사를 참고하여, 관동 지방의 인물들과 일상생활을 다룬 시조로 구성된 시집입니다. 또한 정철은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독서법과 지식 수집법 등을 정리하였습니다.

    정철은 과거의 역사와 지리, 철학, 동양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창작에 응용하여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조선시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시조는 지금도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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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철은 1536년 출생하여 1593년에 사망한 인물로

    우리에게 ‘관동별곡’ 등과 같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항복에게 정철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어보자. 오성과 한음 가운데 오성에 해당되는 이항복은 송강(정철의 호)은 반쯤 취해서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하늘나라 사람인 듯 하지 라고 대답할 정도로 마치 풍류를 잘 알아 천상세계에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 이외에도 1백여 수 이상의 시조 등 주옥과 같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관동별곡은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가사로 이 가사는 지은 이유는 목적성이 있습니다.

    그 목적성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 교화를 위해 관동별곡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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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학자, 작가입니다. 우의정, 좌의정, 전라도체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인데,

    다음의 시기에 관동별곡을 짓게 되었습니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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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철은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4편의 가사 이외에도 1백여 수 이상의 시조 등 주옥과 같은 작품이 전

    해집니다.

    그 가운데 관동별곡은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가사인데, 이 가사를 지은 이유는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즉 정철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 교화를 위해 관동별곡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상당수의 작품들 속에는 이런 목적성이 내포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정철, 그는 실상은 치열한 정치 현장에서 온 몸으로 상대 당파에 맞섰던 정치인으로써 성격이 더 강합니다. 특히 선조시대에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정여립 사건 때는 우의정 겸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숙청하여 원성을 샀습니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다시 복귀했으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에

    우거하다가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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