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시절 쿠테타없이 하나회를 숙청할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을 지나 김영삼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가장먼저 시행한 것이 군부내의 세력인 하나회장군들 및 영관들의 숙청이었습니다.
집권초기에 상당히 신속하게 이루어진것으로 알수있는데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하나회 세력을 눈에 보이게 숙청을하게되면 분명히 군부에서 쿠테타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서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을텐데
별다른 잡음없이 정리를 할수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영삼대통령은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 첫 민간정부였고 미국이 군부독재정권을 더이상 허용하지않았기에 군부가 힘을 못 썼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을 경질하는 등의 단호한 대처로 하나회를 숙청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회가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전에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물갈이하려다 역으로 당한 전례를 고려하여 기습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통령에 오르자 마자 신속하게 하나회가 손쓸
틈이 없도록 수장들을 비 하나회 출신들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중장급 이하들을
보직교체 및 경질 시켜 버렸습니다. 그동안
하나회에 의해 계속 진급이 누락되었던 비하나회
및 비육사장교들은 이러한 조치에 적극적으로
환영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큰소요 없이 군권을
온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본격적인 하나회 숙청에 들어간 때는 취임 11일째 되는 날인 1993년 3월8일 이었다고 합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 중 단 한 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몰랐다고 하며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 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가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권영해 국방부 장관에게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지시했고 이 자리에서 바로 욱국 참모 총장과 기무 사령관을 교체 하는 등 하나회 핵심 인사들을 해고 해 버리면서 숙청 작업을 진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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