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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임
질문자임23.01.09

조선시대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면??

양반가의 아들이 관직에 오르고 난 후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면 그 양반가도 그 죗값을 받게되잖아요? 그렇게 된다면 역적으로 몰린 아들을 먼저 죽인 후에 그 가족들에게 벌을 내리나요? 아니면 아들과 같이 동시에 벌을 받게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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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역적으로 몰린 양반들의 가족들의 행방

    본디 역적의 가족은 연좌법에 따라 벼슬을 빼앗기고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어린이와 여자들은 종으로 삼아 역적을 토벌한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어 있다.

    반역죄의 경우 친가·처가·외가 등 삼족이 화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의 집안이 반역죄를 범했을 경우 남편은 자기와 자기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처와 이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비교적 쉽게 이혼이 허락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화(士禍)를 비롯하여 반역죄로 파직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집안의 딸은 이혼을 당하여 친정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비록 아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역가이혼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입고 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남편 입장에서도 이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는 고사하고, 직계가족을 죽이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대역죄인일 경우 맏아들 정도나 연좌시키지요. 나머지 가족과 노비는 공신가에 분배해서 나누어 가집니다.

    1. 사육신과 갑신정변 연류자의 경우

    세조로 봐서는 역적중에 역적인 사육신의 경우도 그렇고 근세의 갑신정변 연루자인 서재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가족 참형, 부인 자살. 아이는 굶어죽었고)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았습니다. 김옥균은 당연한 일이었구요(김옥균의 경우는 양자로 들어간 탓에 양부는 파직. 친부는 교수형이었습니다. 부인은 당연히 노비가 되었고 일제 연간에 이렇게 적몰한 가문의 생존자가 총독부의 초청을 받습니다) 이런 부녀자가 노비로 전락하는 것보다 죄질이 심각한 경우는 신체를 상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교형"에 처하는 것이 상례이고 노비가 되는 수치를 피하려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남이장군과 남이장군의 노모의 경우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한후 역적으로 몰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예종연간에 남이 장군이 역모 혐의로 박살이 나서 "거열형"+"사거리 효수형" 크리를 당했고 그 일당들도 같이 처벌되었는데요. 문제는 남이의 노모도 같은 형벌을 받습니다. 즉 관비로 전락하거가 교형이 아니라 "사거리에서 공개 거열형"에 처해지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되지요. 그런데 무슨 혐의일까요? 역적의 직계 가족이라서? 남이가 역적질을 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그거보다 더 심각한 역적의 가족도 그런 일은 안 당하지 않습니다.


    3. 사육신인 박팽년의 손자의 경우

    사육신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박팽년의 세 아들, 헌, 순, 분 모두 처형을 당하고 박팽년의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들도 역적의 가족이 되어 노비가 되는 신세로 전락한 상황에서 만삭의 몸으로 도망을 친다.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딸을 낳아도 그 딸은 자신과 함께 노비가 되어야 할 상황에서 이씨는 아들을 출산한다. 그러나 천운이 남았는지 같은 시기 친정의 노비 언년이가 딸아이를 낳고 둘은 아이를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대갓집의 마지막 자손은 언년이의 손에서 노비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인 세조가 말년에 반성과 후회의 세월을 보내며 유명한 사찰을 돌아 다니며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원혼을 달래는 등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평가가 서서히 달라지자 성종 임금 때에 박팽년 손자는 관가에 가서 “이러이러한 연유로 하여 사실은 제가 박팽년 대감의 손자요” 라고 자수를 하였는데, 임금님이 궁궐로 불러서는 “박일산(朴壹刪)”이라는 이름까지 직접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육신 중에 유일하게 자손을 남긴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은 아직까지도 박팽년 할아버지 제사 지낼 때에는 꼭 사육신 전체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순천박씨 문중에서 세운 사육신 사당은 현재 경상북도 달성군에 있습니다.

    역적으로 몰렸을 때 죽거나 유배하는 것의 결정권한은? 왕

    조선시대의 왕은 최고입법자 임과 동시에 최고재판관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민형사상의 판결권은 최종적으로 왕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왕은 반역죄인들을 직접 심문하고 처벌하였으며 사형수와 같은 중범죄인들을의 최종판결도 왕이 하였다.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은 뭐뭐있을까요?

    자기 나라나 임금을 반역한 사람을 역적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주로 왕위 찬탈이나 정권탈취가 실패한 경우, 왕권교체의 거사가 실패한 경우 반역죄로 역적이 되는 경우 입니다.

    1456년 6월 조선의 6대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성삼문·이개·하위지·사육신의 경우와 갑신정변의 실패로 관련자들이 역적이 되었으며, 연산군 때 역적으로 몰린 유자광, 예종 등극 후 역적으로 몰린 남이 장군등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