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때 남이의 역모사건은 어떤사건이었나요?
조선시대에는 당파싸움으로 인해서 갑자기 역신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 조선시대 남이의 역모사건은 어떤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68년(예종 1) 병조참지 유자광의 고변으로 겸사복장 남이와 오위도총관 강순 등이 역모의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이는 계유정난에 참여해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의 원로대신들이 예종이 즉위한 후 세조 말기에 세력을 확대한 남이, 강순 등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으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합니다. 1457년(세조 3)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무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데 세운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공조판서가 되고, 그 뒤 병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강희맹(姜希孟)·한계희(韓繼禧) 등 훈구대신들이 그가 병조판서의 직임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예종도 남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해 병조판서에서 해임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역모모의 하였으나, 유자광에 의해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이의 옥은 1468년 10월 24일 예종이 즉위한 지 한달 보름만에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있다는 고변으로 시작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남이와 강순을 비롯해 민서, 문효량, 변영수, 변자의 , 오치권 등이 역모죄로 죽음을 당한 사건입니다.
예종이 즉위한지 한달 보름만에 1468년 10월 24일 밤 유자광이 입궐해 의산군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 했고, 이에 예종이 좀 더 소상히 고할것을 요구하니 유자광은 내병조에 입직해 있을 당시 남이가 세조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이 사이에 간신들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는 죽음을 당할수있으니 세조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재무을 탐하는 김국광과 불충한 노사신이 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하였으며 오늘 저녁 유자광이 찾아와 강목을 펼치고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광망이 희면 두 해에 걸쳐 반역이 있다 그러니 내가 미리 선수를 치려 한다 라고 하였고, 이러한 일을 발설할 시 한 쪽은 부인할 것이니 발설한 쪽이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고변합니다.
이에 예종은 체포대를 보내고 궐문 경비를 강화, 주요 종친과 대신들을 불렀습니다.
처음 남이는 도주하려 하나 금방 잡혀 국문을 당하니 국문은 에종이 직접 지휘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오늘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얘기하라는 예종의 말에 남이는 이지정의 집에서 바둑을 두다 북방 인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민서의 집에서도 북방에 대한 얘기를 나눴으며 유자광에 집에서는 강목을 꺼내 혜성 출현에 관한 부분을 봤다 라고 합니다.
한차례 고문이 가해지고 유자광과 대질했을 때도 남이는 역모 혐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유자광이 불평을 가져 무고한 것이라 합니다.
같이 국문을 당하던 민서가 이야기하는데 남이가 혜성 이야기를 하면서 간신이 일어나면 내가 죽을터인데 염려가 된다 하였고 간신이 누구냐는 물음에 그 간신은 한명회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핀 후 아뢸 생각이다 라 합니다. 그러나 순장을 하고있어 바로 고하비 못했다고 하며 이에 남이는 한명회가 일찍이 적자를 세우는 일을 논하기에 반역을 꾀하고 있는 걸 알았다 라며 민서의 진술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입시해 있던 한명회는 자신의 무죄를 이야기했고 예종은 한명회의 무죄 진술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다른 이들에게서 특별한 진술이 나오지 않다가 국문이 있은 지 이틀 뒤 문효량이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내가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이를 물리치려 한다 라고 하여 이러한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느냐 라는 물음에 강순이 나에게 난을 평정하는 일을 맡게 했다 라고 했습니다. 강순도 같이 국문 당하나 강순의 무고에 대한 호소를 받아들여 예종은 강순을 풀어줍니다.
국문을 당한 지 사흘만에 남이는 묶은 몸을 풀어주고 술이나 한잔 주시면 다 고하겠다고 말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남이는 자신의 역모를 시인, 시인하는 과정에서 남이는 강순과 더불어 영순군 이부나 조성군, 춘양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라고 하였고 이를 부인하던 강순은 곤장을 맞고 역모를 시인하나 신은 어려서부터 매를 맞은 적이 없어 매를 견딜수 없었다 하였고 남이에게 이를 따지자 남이는 당신은 이미 정승에 이르렀고 나이도 들어 후회가 없겠지만 나는 젊은 나이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합니다.
옥사 이후 남이와 강순, 민서, 문효량 등은 교열형에 처해진 후 일주일간 효수, 남이의 지인들도 같이 죽임을 당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이와 같은 경우에는 유자광의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무고로 인하여
강순 등 여러명과 역모죄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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