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효종의 죽음은 독살이라는 말이 있는데 맞나요?
조선시대 효종의 죽음은 독살이라는 말이 있던데 조선시대에 왕들은 독살에 대한 위험이 항상 있었나요? 그리고 종기를 치료하다가 사망했다는 말도 있고 치료 후 몸에 안맞는 음식을 먹여서 죽게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은 의료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수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렸고 이에 효종이 신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농즙이 나온후 검붉은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 라고 하였으나 정작 큰일은 다음날이었는데,
신가귀의 수전증으로 인해 침이 혈락을 범하여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나왔고 신가귀를 비롯한 어의들이 필사적으로 지혈을 시도하지만 지혈되지 않았으며, 승정원 일기를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어의였던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사망했다고 하며( 실혈성 쇼크사로 볼 수 있습니다. ) 이에 따라 효종의 죽음 자체가 독살이라는 것은 약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의 아들인 현종의 경우 사망하기 전의 상태를 보았을 때 효종과 달리 독살설이 조금 더 힘을 얻고 있긴 합니다.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 효종의 발병 증세는 사소한 것이었다고합니다. 머리 위의 작은 종기가 원인이었고 효종실록에 병세가 처음 기록된 날은 그해 4월 27일이었다고전해집니다.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에까지 번졌으나 '의원들이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다'고 효종이 불평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었다고합니다. 효종은 산침을 놓아 독기를 배설시켜야 한다는 처방에 따라 산침을 맞았으며 당시 어의 신가귀였다고합니다. 여기서 신가귀는 수전증, 즉 손이 떨리는 증세가 있는 의원이었습니다.
다른 어의 유후성이 말리고 나섰으나 효종이 침을 맞을 것을 결정했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자 잠시 후 침구멍으로 피가 나왔다고합니다. 효종은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 했다"며 안도했다합니다. 그러나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며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효종은 침 맞은 자리에서 피가 계속 솟아 나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합니다. 따라서 독살임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이 독살당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닙니다. 김한수 이대목동병원 교수님이 이에 관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했다고 합니다.
효종이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에 인질로 있었던 것이 8년이고 이때 각종 병이 있었고 말년에는 당뇨병같은 합병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1659년에는 오른쪽 귀에 화농성 병변도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의원이 절개술을 했는데 근처에 동맥을 건드려 버려서 과다출혈고 죽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힘이 약해지면 독살의 위험에 처한다고 정황상 얘기들이 있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정확히 나온게 없어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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