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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0

상정고금예문과 직지심체요절의 역사적 우수성에 대해 알려주세요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게 목판 인쇄술의 발달이나 청동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당한 잉크와 종이의 제조등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하는데요. 상정고금예문과 직지심체요절이 역사적으로 매우 우수하다고 하던데 어떤점이 우수한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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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6.20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년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찍어 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상정고금예문>은 현재 남아있진 않죠. 최초의 금속활자 기록물이라는 가치는 있습니다.

    <상정고금예문>이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주장의 근거는 간접적으로나마 다른 문헌의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와 관련해 <직지심체요절>도 많이 언급되죠.

    1377년에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기록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정고금예문"

    예전부터 지금까지(古今) 내려오는 사람이 지켜야할 예의들을 기록(禮文)한 것으로 이후 [[최충헌]]이 책이 오래되고 낡았음을 지적하며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 새로 재작했다. 총 2부를 만들어 1부는 자신의 집에, 1부는 궁에 놔두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고종]] 재임기인 '''[[1234년]]'''~[[1241년]]에 당시 집권자인 [[최이]]가 이를 '''금속활자로 찍어 배포'''했다.[* 한국사 시험 문제에서 [[이규보]]나 몽골의 침략사, 고려의 문화사와 관련지어 보기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 서적이기 때문에 [[직지심체요절]] 이나 다른 고려시대의 서적들보단 출제 빈도가 낮은 편이다.~~그러나 멘붕을 막기위해 이름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몽골의 침입이 일어나게되고 급히 천도를 하느라 궁에 있던 1부는 불에타 없어지고 최충헌의 집에 있던 1부가 가까스로 남아 이를 최우가 총 28부를 복사해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금속활자인 주자(鑄字)로 28부를 찍어 정부 기관에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상정고금예문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기록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이다.] 다만 [[여몽전쟁]]으로 온 나라가 난리였던 통에 금속활자를 개발 및 주조를 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그 전부터 고려에 금속활자 개발 기술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실제로 [[최이]]가 쓴 또다른 글에 따르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금속활자는 남아있지 않으나 목판본은 남아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물]] 제758호.]를 주자로 찍어내어 민간에 배포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전부터 고려가 금속활자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알수가 없다


    "직지심체요절"

    1377년 [[고려]] [[청주시|청주]] [[흥덕사]]에서 고승이었던 백운경한이 쓴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이다. 이 경전은 학승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 현재의 대학원 혹은 사회 학습)에서 공부하는 데 사용되는 학습서 역할을 했다. 그 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가 구한말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구한말 당시 [[주한프랑스공사관|주한프랑스공사]]이자 고서적 수집광이기도 햤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한 고물품들 중에 직지심체요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빅토르 콜랭 드의 이름은 한자로 갈림덕(葛林德)]]이라고 한다. 아마도 '콜랭 드'를 한자로 적은 것 같다. 때문에 직지의 첫 페이지에는 갈('[[葛]]')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이후 1911년 앙리 베베르라는 사람이 재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베베르가 사망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 1900년 파리 엑스포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은 접어두더라도 오리엔트(근동) 지역에서 워낙 유물 유입이 빈번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외규장각]] 도서와 함께 알려졌기 때문에 직지심체요절까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직지심체요절은 외규장각에 있지도 않았다. 외규장각과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바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9급 공무원 시험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이 점을 노리고 문제가 출제된 바 있다. 둘 다 약탈과 관련된 문항을 고르면 틀리는 함정문제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사실도 1972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밝혀졌다. 발견 당시 학계에서는 직지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경|성서]]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박병선 박사는 혼자서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을 입증해낸다. 이로써 그녀는 '''직지대모'''로 불리게 된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정고금예문은 고려시대인 1234년에 활자로 찍어 낸 책이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찍어 낸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