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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3.05

고구려 인시성 양만춘장군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고구려의 안시성 성주 양만춘 장군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왜 위대한것인지 언제태어나 언제 사망하였는지 양만춘 장군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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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0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양만춘은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 성주로 645년 안시성의 성주로서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명대의 웅종곡이 저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에서 등장인물의 하나로 창작되었습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 사회에 전해져 이후의 문헌에 전승되었습니다.

    그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645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과 관련한 중국 송원(宋元) 대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도 역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명대의 웅종곡(熊鍾谷)이 저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이다. 이 책은 흔히 『당서연의(唐書演義)』라고 하는데,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간행본은 1553년의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안시성은 좌우친위군관(左右親衛軍官)이었던 6명의 맹장(猛將)이 수비하였는데, 3명은 절노부(絶奴部)의 주수(主帥)였고 3명은 관노부(灌奴部) 주수(主帥)였다고 하였다. 양만춘은 그중에서 절노부의 주수 중 한 명으로, 안시성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서연의』에 보이는 6명의 장수는 연의소설(演義小說) 속에서 창작된 등장인물이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장수로 창작된 등장인물이 여럿 보인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명과 교류하며 조선 사회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이었다. 『당서연의』와 『월정만필』 등 초기의 기록에서는 양만춘(梁萬春)으로 나오는데, 이후 양만춘(楊萬春)으로 정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만춘 [楊萬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양만춘 장군은 안시성 성주이었는데 군사와백성들을 포함한 인구수는 10만 이었다. 이때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요동성,백암성등 여러 성들을 함락 시키고 안시성으로 왔다.당나라와 안시성의 싸운은 거이 9달 동안 있었는데 3달 동안 고전을 하자 태종이 토산을 쌓아 전투 할때 토산이 무너지며 고구려 군사가 토산을 점령 하고 어느덧 요동(안시성 포함)은 겨울이 빨라서 추위에 떨고 있는데 아직도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아서 고구려의 기세를 본 이세민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 에게 비단 100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양만춘(楊萬春)은 645년 고구려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로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려 시기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의 찬자주1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안시성 성주를

    호걸(豪傑)로 평가하였는데,

    역사에서 성명(姓名)이 전하지 않아

    애석하다고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만춘장군은 을지문덕장군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몰아내고, 가장 근심했던 인물이 양만춘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만춘장군은 연개소문의 의거에 침묵하고 동조합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쳐부술때부터 당나라를 쳐부술때까지 안시성을 담당했던 장군이지요. 양만춘장군에 대한 기록도 을지문덕 장군과 같이 많이 전해지지 않은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실존 이름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이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안시성주라 불립니다.

    안시성주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여 정확한 출생시기, 충생지는 알수 없으며 642년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포함한 100여명을 살해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옹립한 후 스스로 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안시성주는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고연수, 고혜진의 고구려 말갈 연합군대 15만을 무찌른 뒤 안시성을 공격하자, 군사, 백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당나라 군을 물리쳤고,

    당나라 군대가 성 남동쪽에 토산을 만들어 공격해 오자 성위에 목책을 쌓아 대응하였고, 하루에도 6~7회 교전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당나라 군대가 60여일동안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성보다 높은 토산을 구축하고 성안을 공격하자, 토산 공격에 나서 정상을 점령하고 3일동안 계속 된 당나라 군대의 총 공세를 물리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만춘은 고구려 말의 군인으로 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주였는데 1차 고당 전쟁 당시 안시성에서 당태종 이세민의 공세를 막아낸 것으로 유명하며 후대에 구국의 영웅으로 숭앙을 받았습니다. 이를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전하지 않아 그저 안시성주라고 불리기도하나 조선시대 민간전승에 의해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16세기 중국 소설에 최초로 등장하는 가공의 이름으로 실제 이름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양현감의 아들로 양현감이 죽자 고구려에 귀향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