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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3.06.15

고려시대 절에는 어째서 노비들이 존재했나요?

고려시대가 아무리 계급사회이지만 불교는 종교로서 평등이나 자비를 중요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려시대 절에는 많은 노비들이 있었다고 하던데, 당시의 불교는 제가 생각하던 불교와는 다른 방향성을 추구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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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사찰이 소유한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당시의 사찰재산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산으로서의 노비와 부동산으로서의 전토가 그 중심이다. 국가에서 사원의 노비나 전답을 거두어 가기 이전의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다만 태종의 억불책에 의해 사찰의 재산이 공권력으로 확정될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태종 6년(1406)에 조정에서는 남겨 둘 사원의 수와 전답·노비를 정하였다. 곧 개성과 한양의 兩京에는 선종과 교종 계통의 각 1寺에 한해서 200結의 전답과 100명의 노비를 두어 100명의 승려가 살 수 있게 하고, 그 밖의 京內 각 절에는 전답 100결에 노비 50명을 두어 50명의 승려를 살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불교가 승려가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유재산처럼 통용되는 노비도 소유의 개념이었다고 이해하면 더욱 쉬울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도 노비는 존속 하였고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는 주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다양한 형태의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솔거보니와 별도의 호적에 등재되어 주로 토지 경작에 참여하였던 외거노비 로나뉘었다. 강력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던 솔거노비는 주인에게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받아 생활하였지만 주인이 사노비를 선물로 다른 곳에 바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로 절에 노비를 선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노비는 스님들의 생활을 돕기도 했던것 으로 추정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종교 이상의 가치와 권력을 가졌었습니다.

    고려 태조가 건국할 때까지만 해도 지방 호족들을 중심으로 선종이 주를 이뤘는데, 중앙집권제가 구축되면서 문벌 귀족들에 의해 교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민중 사이에는 여전히 윤회설이나 업설을 기반으로 한 불교가 성행하면서, 도교와 풍수지리설 등이 결합되어 기복적인 기도 불교, 의례적인 불교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내게 됩니다.

    혼란했던 12~13세기에는 이를 부처의 힘으로 극복해보기 위한 불교 행사가 성행했고 정치적 혼란의 시기를 틈타 타락한 승려들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불교 사원에 노비가 있었던 것은 왕실이나 귀족들로부터 시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대형 토지 등 농장을 운영하였고, 시주받은 노비에게 사역을 시키는 것이 당연시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불교는 이후 타락을 거듭하여 기복적인 궁중 불교라든지 고답적인 산중 불교같은 민중과 거리가 먼 종교가 되어버렸고 더욱이 몽골의 지배 아래 의례가 너무 남발되면서 불교는 고려가 멸망하는 데 한 원인으로까지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