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중국의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 사상자 규모 등만 배웠지,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는데,
천안문 사태는 왜 발생한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어
1989년 6월 4일에 중국 공산당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끝이난
민주화 운동 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안문 사태의 원인으로는 개혁개방이 불러온 사회적 모순,당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 일당독재 및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이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안문사태는 1976년 4월에 일어났던 봉기로 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던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중국인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반발한 봉기입니다.
저우언라이의 추모 행사에 대해 중국 공산당에서 방해하고 비난하는 발언을 하자 인민들은 분노했고, 그 결과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안문 사태는 우선 등소평의 개혁개방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1978년 권력을 잡은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중국을 개혁개방하여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자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등소평이 겉으로 보여지는건 1인자가 아니라는겁니다. 국가주석도, 국무총리도 그리고 중국공산당 총서기 직도 아무것도 맡은것이 없습니다. 물론 이중 최고권위는 공산당 총서기입니다. 국가주석은 외부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지 실지 내부총 정책을 지휘하는 사람은 총서기가 실질적인 1인자입니다.
그런데 등소평은 실권만 장악하고 그 중요한 총서기직마저 본인이 하지 않고 후야오방이 총서기 직을 맡습니다.본인은 뒤에서 지휘하곘다 그거지요... 처음에 후아요방이 등소평의 후배이긴 하지만 점차적으로 나라가 발전하고 민주나 자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점점 등소평과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80년대 중후반은 중국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하는 단계였습니다. 처음에 등소평이 정권을 잡은 1978년만 해도 먹고 사는게 우선이였으니 정치니 민주니 자유니 이런거에 대한 욕구가 크게 없었습니다. 사실 먹고 살아야 다른 요구사항도 제안하는거잖아요..그리고 문화대혁명시기 1966년부터 중국의 대학들을 다 문닫아버리다보니 실제로 지식인들도 없습니다. 원래 이런 사상이나 민주, 자유에 대한 요구는 지식인들이 앞장서는데 지식인들이 없다보니 앞장설 사람도 없었고...초기에는 민주의식에 대해 요구할 사람도 사회적 상황도 되지 않았다 그거지요.
그러나 경제가 고속도로 발전하고 지식인들도 늘어나고 하니 이제부터 자유에 대한 욕구 특히 언론자유에 대한 욕구가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민주와 언론자유에 대해 토론들이 많이 오가게 되였고요...
이시기 중국의 2대 권력자중 등소평은 약간 보수적으로 지금 이대로 나가자는 주의이고 후야오방은 학생들의 입장을 많이 대변하는 편입니다.그도 그럴것이 후야오방은 국가주석이 되기전에 중국청년조직의 수장인 공청단주석을 임하면서 학생들의 입장이나 요구사항을 잘 알고 있는 편이라 이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였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개혁개방의 총 수장이 등소평이다보니 후야오방이 이길수가 없었지요. 그러다거 1986년에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오쯔양이 대리 총서기직에 오릅니다. 이 사실을 두고 외부에서 특히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야오방이 자유와 민주를 고집하다가 등소평한테 찍혀 밀려났다는 설이 나돌게 됩니다.
그리고 1989년 4월에 양회가 끝나고 후야오방이 죽게 됩니다. 그때 대학가에서는 양회기간에 등소평과 민주와 언론자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뇌출혈로 죽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돌게 됩니다. 그리고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행사가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천안문광장에서 진행된 후야오방 장례식에 학생들이 참여하면서 사태가 커져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5월 2일에 54운동을 기념으로(중국의 5월4일은 우리 31운동과 같은 54운동기념일로 공식적으로는 54청년절임) 전국대학생 대시위가 일어나고 이 시위에서 자유와 민주에 대한 청원서를 자오쯔양에게 올리면서 민주와 언론자유에 대해 요구하게 됩니다.
이 요구내용에 대한 정부의 답변이 점점 늦어지자 5월중순부터 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도 벌이면서 전국에 호소하였고 이에 응하여 전국의 학생들이 앞다투어 시위를 벌이게 되고 성인들도 이에 참여할가 말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사태가 건국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중국정부는 드디어 시위를 진압하게 되고 계엄을 실시하여 학생들을 타일러 학교로 보낼 예정이였으나 학생들은 천안문광장에서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 없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대치하자 결국 6월4일에 군사를 파견하면서 64천안문사태가 터진거지요.
보통 64천안문사태라고 하는데 6월4일에 시위가 시작된게 아니고 6월4일에 군사를 투입하여 진압을 시작한 날자가 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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