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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04

중국 천안문 사태 발생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중국에서는 지금도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 같은데요 철저하게 통제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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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0주년, 5·4운동 70주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출신의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사망, 중국 경제 통화팽창, 중국 공산당 관리들의 부패, 중국의 대량 인민 실업 직면, 소련 공산당 개혁파 고르바초프의 방중과 중국 공산당의 경제 개혁 결정이 주요한 배경이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9년 4월 당시 급진 개혁주의로자이자 학생들로부터 추앙받던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가 사망, 이를 계기로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보수파에 대한 비난 등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확산됩니다.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기 시작했고 여기에 일반 시민이 가세해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됩니다.

    이후 민주화 요구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톈안먼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 시민 등 100만 명이 연일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합니다.

    연일 대대적인 집회가 계속되자 당내 보수파는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 6월 4일 새벽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하고 이 과정에서 1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6년 4월 4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화환을 바치는 가운데,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칭(江靑) 등 문혁파(文革派)를 비난하는 표어와 구호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에 북경시 당국은 4월 5일 새벽 저우언라이를 추도하는 화환을 철거했는데, 이에 학생들이 방화 등을 하며 반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마오쩌둥·장칭 집단은 톈안먼 광장에 광장 주위 정규군 3개 사단과 약 4만 명의 민병을 투입하여 유혈 진압함으로써, 3000여 명이 사망·부상·체포당했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비판을 받고 실각됐으며, 화궈펑(華國鋒)이 새로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6년 10월 강청 등 4인방(四人幇)이 체포되면서 덩샤오핑은 이 사건과 관련 없음이 발표되었고, 이에 1977년 7월 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에 복권되었다.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되면서 개혁개방 노선을 실행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자본주의적 병폐가 드러나게 되었다. 더욱이 경제적 개혁(시장기구의 채택)에 비해 정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아(신권위주의 일당독재) 기득권을 가진 공산당의 부정부패 등이 만연하게 되었고, 급증하는 인플레이션과 소득격차의 확대 등으로 일반 민중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감이 고조되었다.

    일반적으로 톈안먼 사태는 1989년 발생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이는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에 대해 중국 정부가 계엄군을 동원하면서 사상자를 발생시킨 유혈 사태를 지칭한다.

    1989년 4월 당시 급진 개혁주의로자이자 학생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가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보수파에 대한 비난 등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일반 시민이 가세해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됐다. 이후 민주화 요구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톈안먼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 시민 등 100만 명이 연일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연일 대대적인 집회가 계속되자, 당내 보수파(덩샤오핑)는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6월 4일 새벽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1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중국 정부는 200명 사망 주장)하는 등 최악의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사태 이후 열린 제13기 4중전회(四中全會)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민주화 시위를 지지해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장쩌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장이 총서기로 선출됐다.

    서방 각국은 톈안먼 사태에 대해 중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하였고, 특히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해 ▷정부 고관에 의한 접촉의 금지 ▷군 관계자의 교류 정지 ▷무기와 고도기술의 수출 금지 등의 제재조치를 발동하면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해 7월에 파리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의에서도 중국을 비난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각국의 견해가 각각 다르고, 미국도 이후 부시 대통령의 보좌관(국가안전보장 담당)을 베이징에 대사로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 밝혀지자 점차 타협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 정부가 중국을 고립시키기 않도록 각국에 공작한 결과 각국의 제재조치는 점차 완화되었으며, 미국도 최혜국대우에 대해서 무조건으로 연장을 인정하였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