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때 화폐가 있었을 텐데, 굳이 상평통보 화폐를 다시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때 은화라는 화폐가 있었는데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다시 발행해서 유통했다고 하는데요
굳이 그 전의 화폐가 있었는데, 다시 상평통보를 유통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평통보 제작의 의의는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배경하에 1678년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평통보는
조선 말기까지 법화로서 계속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건 조선사회의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1600년대 후반 조선왕조가 동전, 즉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 보급 시키게 된 이유는
1. 왜란을 전후해 사회경제가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 빈약한 농업에 의존해온 조선사회에서 일찍부터 통화기능을 발휘해 온 쌀, 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화폐기능이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이와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상품, 교환 경제 내지 사회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해 전근대적 명목화폐인 동전 통용의 필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2. 전통적으로 빈약한 농업에 경제의 기초를 둔 조선왕조는 양란을 겪으며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경제정책으로 또는 급박한 국가재정 조달을 위한 재원확보책으로서 동전 통용, 즉 명목화폐제도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3. 개성은 일찍이 동전 등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유통을 시도한 고려왕조의 수도였고,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화폐수용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컸기때문에 1640년대 국내의 다른 지역보다 앞서서 동전이 통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조 당로자나 지식계층으로 하여금 국내의 다른 지방에도 동전의 통용이 가능하리라 확신을 가지게 했으며 그와 같은 확신은 화폐유통을 위한 그들의 정책 의욕을 높이게 됩니다.
4. 쌀, 포 등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조선사회에는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의 명목화폐 , 즉 동전의 유통에 대한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이와 같은 중국의 영향은 동전 유통의욕을 증진시켰습니다.
5. 이상과 같은 몇가지 사실들, 즉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배경하에 1678년 당시의 영의정 허적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정책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상업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부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면서 화폐도 발행하여 유통시켰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유통되었던 은화의
통용을 금지하고, 지폐인 저화나 조선통보, 십전통보 같은 동전, 전폐라는 독특한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폐는 일반 백성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통용되다 중단되곤 하여 유통이
활발하지 않았습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부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상품 유통이 발전하였습니다.
원래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농민들의 특산물을 받아 조달하였고, 대동법 실시를 통해 대동미라는
미곡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 미곡을 공인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상품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곡등이 이동하기에 무거워서 그보다 가벼운 금속화폐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동이 용이한 금속화폐의 유통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상평청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78(숙종 4)부터 조선시대의 유일한 법화로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상평통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관찬(官撰) 기록에서는 동전(銅錢)이라 했고, 또는 엽전(葉錢)으로 속칭되기도 하였다.
한국 화폐 발달사에서 볼 때,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려 한 것은 10세기 말, 즉 996년(성종 15) 철전(鐵錢)을 주조, 유통하고자 했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후 고려왕조는 동전·은화(銀貨:銀甁·碎銀 등) 및 저화(楮貨)를 법화로서 유통시키려 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부터 종이돈이나 동전을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은 거듭 시도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 각종 화폐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추진된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당시 왕조 당로자(當路者: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정책적 의욕의 발로에 그쳤을 뿐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즉,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화폐유통을 위한 정책은 당시의 절실한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해서 시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폐나 동전 등과 같이 국가가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던 화폐들 중, 그 어느 것도 계속 화폐기능을 발휘하면서 화폐의 역사적 기능을 담당,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상공업에 대한 조선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관영 상공업체제가 무너지는 한편, 사영수공업과 자유상업은 성장, 발전했다.
토지소유제 및 지배체제의 문란으로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특수 계층의 토지광점(土地廣占) 대토지 경영의 가능성이 커지고, 영리 위주의 상업적 농경이 확대, 보급되는 등, 농업생산 분야에서 이윤추구를 합리화하는 흐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대동법(大同法)이 확대 실시됨으로써 조세체계가 단순, 합리화되는 동시에, 상품생산 내지 교환경제가 더욱 발달했다.
왜란과 호란 후부터 조선의 대청·대일 관계는 대체로 안정기에 들어서고, 이에 따라 양국과의 무역거래가 그 전보다 활발해져 국내 생산력이 증진하고 상품·교환 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양란 후에 인구는 급격히 증가되고, 이로써 사회생산력이 증진되는 동시에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사회의 경제구조 및 제반 생산양식이 변화,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을 전후해서 봉건 사회신분제도가 빠르게 해체되어 사회 신분질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전통적 생업관이 변질되었으며, 또한 농업에 의존하는 국가 경제기반의 취약점을 보완할 필요성 등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수공업과 함께 상업을 진흥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전란 뒤 사회·사상적 혼란에 대한 반성과 청나라 고증학 및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흐름으로서 합리성과 실용·실제성을 강조하는 실학이 발생하여 학문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봉건 조선사회의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1600년대 후반에 조선왕조가 동전, 즉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 보급시키게 된 배경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왜란을 전후해서 사회경제가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서 빈약한 농업에 의존해온 조선사회에서 일찍부터 통화기능을 발휘해 온 쌀·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의 화폐기능이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상품·교환 경제 내지 사회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해 전근대적 명목화폐인 동전 통용의 필요성이 커졌다.
둘째, 전통적으로 빈약한 농업에 경제의 기초를 둔 조선왕조는 양란을 겪으면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경제정책으로, 또는 급박한 국가재정 조달을 위한 재원확보책으로서 동전 통용, 즉 명목화폐제도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셋째, 개성은 일찍이 동전 등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유통을 시도한 고려왕조의 수도였고, 또한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화폐수용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비교적 컸다. 따라서 1640년대는 국내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앞서서 동전이 통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조 당로자나 지식계층으로 하여금 국내의 다른 지방에서도 동전의 통용이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고, 그와 같은 확신은 화폐유통을 위한 그들의 정책 의욕을 높였다.
넷째, 쌀·포 등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조선사회에는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의 명목화폐, 즉 동전의 유통에 대한 직접·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이와 같은 중국측의 영향은 동전 유통 의욕을 증진시키게 했던 것이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 즉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배경하에 1678년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되었고,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법화로서 계속 통용되었다.
조선왕조가 상평통보를 법화로 주조, 유통하기로 결정한 뒤, 호조·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정초청(精抄廳)·사복시(司僕寺)·어영청(御營廳) 및 훈련도감(訓鍊都監) 등 7개 관청 및 군영에서 그것을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후 상평통보는 중앙의 각 관청이나 군영에서 주조,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조, 유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평통보가 법화로서 계속 통용될 수 있다고 확신됨에 따라, 조선왕조는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즉, 조선왕조는 ‘화권재상(貨權在上)’ 내지 ‘이권재상(利權在上)’의 전통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화폐 원료 수급을 적절히 조정하며, 상평통보의 주조 및 발행 과정을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관리 통제하기 위해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 이유는 고려라는 나라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죠. 예를들어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때 쓰던 화폐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