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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5

중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동아시아의 결정적 사회배경은 무엇인가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영토 위에서 중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발생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당시의 결정적 사회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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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습니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때마침 중의원(衆議院)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때 이미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계책을 꾸몄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 항을 출발, 9일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하였습니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경인(京仁)주1간에 집결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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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25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임오군란 때부터 민비(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일방적으로 조선의 종주를 주장하는 청나라에 대해 일본 제국이 일으킨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전쟁이다. 당시 임오군란 때 민비(명성황후)는 청나라의 보호를 받는 한편,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조선을 속방(법적으로 독립국이나 군사적으로 비독립적인 국가)으로 주장하는 조중정장 조약을 민비(명성황후)와 체결하였고 급진개혁파는 조중정장 조약을 반대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실패하였고 이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오전쟁, 일본에서는 일청전쟁,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불린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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