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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5.27

조선시대 백정은 사실 외국인이었나요?

조선시대에 가축 등을 잡은 사람인 백정이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라기보다 말갈, 여진, 거란 등 외국인들이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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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 세종은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양수척 등을 양민화시켜서 국력을 증진하고 동화시키려 했다.[12]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꾀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 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즉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자니 개간된 땅은 부족하고,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질의 유혹에 빠지고, 정착하고 싶어도 정착할만한 항산이 없는 경우도 많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화척들은 백정에 편입되는 걸 원치 않았고 기존의 백정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백정들은 자신을 구백정이라 부르고 화척들은 신백정으로 구분해서 동화되는 걸 꺼렸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구백정은 백성이라 칭하게 되고 백정이란 말은 화척들만을 칭하게 되는 단어로 남았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호원 사이에서 욕설로 '백정의 자손' 패드립이 시전됐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 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세종이 양민화를 시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13] 상인(常人), 혹은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태종 때까지는 백정은 고려 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가리켰지만 세종 때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

    결국 정착생활을 할 항산이 있었던 극소수 백정과 줄을 잘 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양민화에 실패했다.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안건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한양 인근에서까지 백정 도적 떼가 출몰해 토벌 논의가 벌어질 정도니 해결은 요원했다. 죽으라고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 결국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과 재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과 재인 무리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

    사실 조선 조정은 의외로 전근대 왕조 국가치고는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인내심으로 백정들을 어떻게든 안고 가려 노력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고 애썼는데, 유랑생활과 수렵에 익숙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겉돌며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관가까지 털었다. 조정이 추진한 양민들과 통혼과 동화는 양민들뿐 아니라 백정들도 거부했다. 당시 조선 백정 집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 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 마을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일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검거하기 쉽지 않은 게, 관리가 몇 번이나 우마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 마을 앞이었으나 남녀 구분 없이 말 타고 활 쏘는 집단이다 보니 백정 마을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처리를 못 한 정도였다.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칫거리였다가 중종대에 수그러들고 명종대에 임꺽정이 난리 한 번 터뜨린 걸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후 백정 도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전의 서술과 달리 활도 못 쏴서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적개심을 재고시키기엔 지난 600년간 트러블은 백정과 양민 사이에 너무도 뿌리 깊은 불신을 일으켰다.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기까지는 양인들도 도축업을 하였으나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양에서 도축업을 금지하면서 양민 도축업자들은 몰락했다. 하지만 그때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법외의 존재들이라 마치 금주법 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다.[14]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저 조선 초기 백정이라는 집단이 완전히 이질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이들은 신량역천인에 포함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다.[15][16] 아니 신량역천이라는 표현이 조선시대에 나왔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어부나 목축업[17]도 신량역천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이들을 일반농민들과 동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 그 예인데 어간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어부가 되고, 소금 만드는 이들이 염간이라고 하다가 염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정부의 공식적 시책 기준에서만 사실이다. 하지만 천민 문서에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양민이지만, 고려시대 이래의 신량역천 대우인 것처럼 하는 일이 차이가 없는데, 시선이 변할 리가 없다.[18]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식은 극 초기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반발, 이전에 유목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경제적 기반도 없이 사회적 차별을 받으면서 동화되라고 했으니 신백정이 역시 반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목집단에 도축업을 금지하기도 어렵고, 유목집단이라는 이야기는 땅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린데 이 사람들 제대로 정착하게 하는 정책도 사실상 없었다. 세종대에 신백정들을 정착시키려는 방안으로 제기한 것이 공물 좀 적게 걷고 땅 많이 가진 사람들 땅을 주자는 것이다.

    역사채널e - 외면당한 진실, 백정이라는 동영상은 구한말 외국인이 목격한 서양적 외모를 지닌 이를 백정이라 하고 있는데 원문은 백정이 아닌 항구에 있던 조선인을 묘사한 것이다. 이외 다른 이들의 기록에서도 조선 아이의 눈이 파랗고 머리색은 적갈색이며 상류층의 경우 서양인 종과 비슷하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런 지나가듯 써놓은 서술의 신빙성은 별로 높지 않고, 정말 그런 케이스를 목격했다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근거도 없다. 또 동영상에서 주장하는 백인 계열, 즉 몽골 밑에서 용병 민족으로 이름을 날렸던 타타르족들이 고려에 정착했다 하더라도 일부일 뿐 그들이 친족들을 이끌고 와서 대규모로 떠돌이 생활을 했을 확률은 한없이 낮다. 게다가 한반도에 가장 많이 섞여든 이민족은 거란, 여진 같은 몽골로이드 계열로 애초에 겉보기로는 한민족과 별로 구분되지 않고 특히 여진의 경우는 유전적으로도 차이가 거의 없어 더욱 구분되지 않는다.

    출처: 나무위키 백정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정은 조선땅에 살고있어 조선 백성이기는 하나 원래 북방을 떠돌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백정의 뿌리에 대한 기록에

    우리나라 재인과 백정은 그 선조가 오랑캐의 종족입니다.그래서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쏠뿐만아니라 천성이 모두 사납고 용맹스러워...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정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뜻합니다.

    원래는 조선 초기에는 백정은 백성이라고 일반 백성이라고 불렀지만, 세종대왕 이후부터는 직업들을 체계적으로 나누고 관리하고자 명칭을 새로이 개편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식칼을 들고 소,닭,돼지,오리의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남자가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리게 됬죠. 그러나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었습니다.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으며 도축업 이외에도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의미의 단어였죠.

    왜냐면 백정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던 직업이었습니다.

    비록 조선은 생명존중사상이 있어서 소,닭,돼지,오리라 할지라도 이런 생명체를 죽이고 피를 묻히는 백정에 대해서 조선 사회는 그다지 반갑게 여기지 않았고,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여튼 백정의 조상은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아무도 하지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이런 직업을 하게됬죠.

    고려시대 화척이라고 불리는 용병단이 있었습니다.

    수척(水尺)·무자리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신라 말 고려 초 혼란기에 유입되었던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용병 단체였는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화척으로 불렸다가 조선 초에는 백정(白丁)이라고 바뀌어 불렸죠.

    화척은 전쟁을 하면서 돈벌이를 삼던 용병 단체였는데 돈을 많이 못벌면 유랑하면서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했습니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공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죠.

    근데 백정이 백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구한말 외국인이 목격한 이를 백정이라 하는데 서양인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기록하기도 했고. 이외 다른 이들의 기록에서도 조선 아이의 눈이 파랗고 머리색은 적갈색이며 상류층의 경우 서양인종과 비슷하다고 적고 있죠.

    또 페르트나 랜도어 등 다른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도 '한국은 유난히 다인종성이 많은 나라다'같이 서술하기도 했죠.

    그러나, 백정이 백인이 아니라 황인인데 백정에게서 알비노 계열이 자주 태어날수도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백정은 너무나 천대받던 직업이라 백정은 백정들끼리밖에 어울리지 못하였고, 그로인해

    백정처럼 외부와 교류가 적고 폐쇄적으로 내려오는 단체는 열성인자의 발현으로 눈동자 색깔이나 머리 색깔이 서양인처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멜라네시아인 등 서양인과는 무관한 인종들에게서도 금발벽안의 특징이 발현되는 것을 보면, 이 특징을 서양인만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백인계열 즉 중세시대에 몽골제국 밑에서 용병단으로 이름을 날렸던 투르크족(돌궐족), 타타르 족들이 고려에 정착했다는 주장도 있죠.

    신분은

    조선시대까진 최악이었습니다.

    소,닭,돼지,오리를 죽이는 직업이어서 그런지몰라도...

    조선시대 말까지 사실상 거의 살인,강도,방화를 저지르는 살인자들은 백정들이 거의 99%였다고 합니다..

    세조 시대에는 백정들이 도적단, 해적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죠. 하지만 중종 시대에 한양 인근에 대검을 든 백정 도적단이 출몰해 토벌 논의가 벌어질 정도니 해결은 요원했죠. 죽어라고 말을 안들어 처먹으니 결국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백정들은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버렸죠. 그 정도는 심각하여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 이었다고하죠.

    이건 조선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백정의 문제였죠. 하지만 방랑 생활을 하면서 용병까지 하던 그들은 검과 방패를 쓰는데 달인이었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툭하면 해적단이나 도적단, 산적단으로 위장해 민간인을 학살하고 심지어는 관청까지 습격했죠.

    당시 조선 백정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도적단들을 검거하면 다 백정, 살인자의 절반은 백정, 가축 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단으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 정말 이 정도 수준이었죠.

    그렇다고 검거도 쉽지가 않은 게, 군인들이 몇 번이나 마차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 마을 앞이었으나 남녀 구분 없이 말 타고 대검을 휘두르다 보니(이건 뭐 RPG게임도 아니고;;)

    백정 마을에 진입하는 것부터가 장벽 이었죠.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치거리였다가 중종대에 수그러들고 명종대에 임꺽정이 난리 한 번 터트린 걸 마지막으로 끝이 났죠.

    이후 백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며, 임진왜란 7년전쟁때에는 기존의 서술과 달리 검도 못 쓰고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하였으나,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적개심을 재고시키기엔 지난 조선시대에 있었던 백정들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죠.

    조선 초 100여년 간 트러블은 백정과 국민 사이에 뿌리 깊은 적대심을 야기시켰죠.

    즉 간단히 말하면 유럽의 집시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지독한 방랑 범죄 단체가 조선 초기의 백정이었죠.

    고로 현대 드라마에서 나오는 백정의 이미지는 조선 후기의 백정에 가깝고, 가장 가진 것들이 없는 이들의 분노라는 클리셰적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백정이 한창 문제였던 조선 초기에는 조선 정부나 일반 국민보다 백정 자체의 문제가 훨씬 컸죠.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소,닭,돼지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시대까지는 국민들도 소,닭,돼지 도축업을 하였으나 농사에 지을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양에서 도축업을 금지시키면서 양민 도축업자들은 몰락했죠. 허나 그 시대에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무법자들이었으며(;;;;;;)

    고기먹고 싶다고 수시로 소와 말을 훔친 악명 높은 도적단이었죠;;;;;;;;;; 참고로 말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싼 생명체이자 재산품이었는데, 인간이 죽은 것보다 말을 죽인 것의 처벌이 더 강한게 조선시대였죠. 왜냐면 조선시대에서 말은 전쟁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말을 죽이면 조선이 패전하도록 만드는것이고, 조선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야말로 인간 1명 죽는게 문제가 아니라 적군들에게 죽는 백성들은 어마어마하니까.....

    여튼 이런 강력 범죄를 일으켜도 군인이 출동할 급이 되어야 처리하던 이들이라 마치 유럽의 금주법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죠.

    임꺽정도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일정한 군락에 모여 살았으며, 이런 마을엔 군인들조차 들어가길 꺼려했던 엄청 험한 산세에 자리잡았죠. (한반도의 험한 산세는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심지어 귀족 지배층인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던지.

    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세금 납부의 의무가 적었으므로 가난한 일반인이 일부러 백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소,닭,돼지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고 합니다. 특히 소는 주로 양반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수익이 많았죠.

    이처럼 수익이 많은 반면에 옷차림이나 집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쓰지 않아서 의외로 부자가가끔 있었죠. 때문에 곳곳에서 백정 부자들이 등장했고 이후 계급제 폐지 등으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여담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청제국으로 끌려간 전쟁 포로들을 귀환시킬 때 귀환을 거부한 일부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백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농업 사회로 백정을 천시하는 조선과 달리 유목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청제국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검을 만드는 대장장이들이나 일부 과학자들이나 총이나 화약 제조술을 아는 고급 기술자들을 우대해줬고, 또한 목축업이나 소,닭,돼지의 도축업을 했던 백정은 고급 기술자라 우대해줬고 이는 청제국에 끌려간 백정들도 마찬가지로 우대해줬기에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것이죠.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일부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였죠.

    구한 말~일제강점기에는 형평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백정들이 자기의 권리를 더 받으려 했었다. 이때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죠.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게 형평운동이었죠. 일본강점기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 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죠.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죠.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50년 6월까지 이어졌으나 남북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족보가 소실되거나 백정 마을이고 뭐고 다 해체되고 사라졌으며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예 출신을 천시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당 부분 희석되게 됩니다.

    외국인 노동자이자 용병단이었던 백정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원래 파란눈에 서양인을 닮은 외모를 지닌 백정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찾아볼수없게되고, 지금은 다 한국인처럼 생기게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