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더불어 '이성계 캠프'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성계·정도전에게 등을 돌린 것은 토지개혁이 추진될 즈음부터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태도가 달라졌는데 위화도회군을 지지했던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과전법 추진을 놓고 분열된 시점부터 그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면서도 다소의 개성을 띤 <고려사절요>는 이때부터 "정몽주는 양쪽 사이에서 우물쭈물했다"했다고 서술합니다. 정몽주의 우물쭈물함은 머지않아 단호함으로 바뀌고, 그는 고려왕조를 사수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게 되는데 그랬다가 선죽교에서 화를 입게 됐던 것입니다. <단심가> 마지막 대목에서 정몽주는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읊었는데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 리가 있겠느냐고 읊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우왕·창왕 폐위에 가담했습니다. 일편단심이 지켜지지 않고 두 번이나 꺾였던 것인데 정몽주가 위화도회군을 지지하고 우왕·창왕 폐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그가 1388년 시점에는 충신이 아니었음을 의미 합니다.
고려 말에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 들여온 성리학은 여말선초 신진사대부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들 신진사대부들은 포은 정몽주 등의 절의파와 삼봉 정도전의 역성혁명파로 나뉘어져서 고려 체제를 나두고 개혁을 하고자 한 정몽주는 새로운 체제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역성혁명파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