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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5.29

한국 최초의 만화는 언제 나왔나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만화 혹은 만화책이 등장한 것은 언제인가요??

일제 시대인가요? 아니면 해방 이후인가요?

최초의 만화도 시사 풍자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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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최초의 만화는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게재됐던 이도영 화가의 1컷 시사만화인 『삽화』였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화 소비 형태와, ‘만문 만화’ 키네틱 아트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 한국만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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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최초의 만화책은 1946년에 김용환 작가가 쓴 작품으로 '토끼와 원숭이’입니다. 현재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경매시장에 나오기 전에는 김용환 작가의 흥부와 놀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었습니다. '토끼와 원숭이'는 그림이 뛰어나고 동물을 의인화 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만화보다 시대적으로도 앞섰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만화책이 사회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를 들어 대량 소각된것을 볼때 이 작품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만화책이 아닌 만화로서 첫작품을 알아본다면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라는 이름의 1칸 만화(시사만화)가 현대 한국 만화의 효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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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기원
    만화와 회화를 내용성 ·표현양식 등으로 구별하는데 어느 방법을 막론하고 만화와 회화의 역사적 기원은 동일시된다. 제4성층 후기 지구 전체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을 때, 인간은 이미 동굴 속에서 벽화를 그렸고, 사슴의 뼈나 뿔에다 칼로 조각하였다. 석기시대를 거쳐 이집트의 신문화시대로 들어서면서, 초기 피라미드 내부와 후기 룩소르신전 등에 그려진 새와 동물들의 의인화된 그림들은 다분히 만화의 기본요소인 희화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후 유럽의 르네상스문화의 개화에 따라 희화적인 작품이 많은 목판화나 동판화로 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독일의 A.뒤러가 ‘죽음과 악마’를 소재로 하여 그린 작품이나 보슈의 환상적인 유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요괴들과 악마들은 만화의 기본요소인 과장법으로 그려진 것들이다. 바로크시대 고야의 《로스 카프리치오스》 등 악마적인 동판화 시리즈는 희화성이 강한 회화라기보다는 회화적인 만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18세기 말경의 순수문화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개인사상의 존중과 자유, 독창성이 강한 표현양식이 빛을 보기 시작하자 회화 역시 다양성을 띠기 시작했고 19세기의 인쇄술 발달로 현대만화로 발전되었다.

    2. 분류
    만화는 내용과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시사만화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시사에 맞는 그때그때의 상황을 풍자한 만화이다. 유머만화는 가정물 ·아동물 ·동물만화 등 시사성을 초월하며 예술성을 지향하는 만화이다. 극화는 소설처럼 긴 스토리를 한 장면 한 장면 순서대로 변화시켜 엮어나가는 만화이다. 표현은 유머만화적일 수도 있고, 사실적인 삽화적일 수도 있고 비현실적 ·초과학적인 과장법을 쓸 경우도 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단편만화이다. 월트 디즈니프로덕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3. 역사
    현대회화의 시발점을 19세기 후반으로 본다면 현대만화의 시발점도 이와 거의 같은 때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 당시에는 만화를 화가의 여기(餘技)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가이며, 회화사에 길이 남을 《크리스팽과 스카팽》 《삼등열차》 등의 명작을 남긴 오노레 도미에는 신문에 당시 국회의원들이 의회에서 한 발언장면, 법원에서의 재판광경 등을 만화로 그렸을 뿐 아니라, 당시의 프랑스왕 루이 필립을 서양배(꼭지쪽은 가늘고 밑쪽이 넓은) 모양으로 그려서 신문에 실어, 6개월 간의 금고형을 받는 필화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데생의 천재로 알려졌던 H.T.로트레크의 유화작품은 인상파미술관 속의 커다란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대가이나 역시 신문에 많은 만화를 그렸다.

    한국의 경우, 1930년대에 동양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 잡지에 단편만화를 그렸고, 노수현(盧壽鉉)은 1924년대에 《조선일보》에 《멍텅구리》를 연재함으로써 신문만화의 새 기원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순수회화작품으로 만화를 앞지르는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대체로 만화가의 작품(본격 만화작품)으로 알려지기보다는 화가의 여기작품으로 알려졌다.

    4. 한국


    최초의 순수한 만화가는 김규택(金奎澤)이다. 그는 《신동아(新東亞)》 《별건곤(別乾坤)》 《조광(朝光)》지 등에 많은 단편만화와 만화 ·만문형식의 《억지춘향전》을 연재하여 세인의 눈을 끌었고 8 ·15광복 후에는 주간지 《새한민보》 표지에 시사만화를 연재하였다.

    신문만화로는 1924년대에 노수현이 《조선일보》에 《멍텅구리》를 연재하였고 광복 후엔 김중현(金重鉉)이 때때로 잡지에 만화를 그리곤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린이잡지 등에 소설삽화를 그리던 김용환(金龍煥) ·김의환(金義煥) 형제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김용환은 《서울타임즈》에 《코주부》를, 김의환은 《어린이 나라》 등 어린이잡지에 많은 만화를 그렸다. 또 시인 김소운(金素雲)이 《만화행진》이라는 주간 만화신문을 발행하여 종래 만화란 어린이 전용의 것으로 여겨왔던 일반에게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곧 폐간되었고 김용환이 《만화뉴스》를 발간했는데 《연합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던 김성환(金星煥)과 신동헌(申東憲)이 이에 참여하던 중 6 ·25전쟁이 일어났다. 피난지에서 박성환(朴聖煥)이 《만화신보》, 김용환이 《만화신문》, 김성환이 《만화승리》를 제작하는 등 주간 만화신문이 잠시 활기를 띠었다.

    환도 후엔 김성환이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영감》을 연재하고(80년도에 조선일보로 옮겨 연재하다 현재는 文化日報에 연재중), 곧 이어 안의섭(安義燮)이 《경향신문》에 《두꺼비》를 연재했다가, 《문화일보》에 연재했으며 정운경(鄭雲耕)의 《왈순아지매》가 《대한일보》 《경향신문》을 거쳐 《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며 백인수(白寅洙)의 《사회희평》이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것이 신문만화로선 장기간의 연재물이다. 신문 ·잡지엔 김일소(金一笑) ·김경언(金庚彦) ·길창덕(吉昌悳) ·박기정(朴基禎) ·임창(林創)이 그려온 한편, 오룡(吳龍)이 《조선일보》에 《야로씨》를, 윤영옥(尹暎玉)이 《서울신문》에 《까투리여사》를 연재했다.

    환도 후의 아동만화계에는 만화잡지가 붐을 일으켜 이상호(李相昊) ·정한기(鄭漢基) ·박기준(朴基埈) ·김정파(金靜波) ·신동우(申東雨) ·김종래(金鍾來) ·박현석(朴賢錫) 등이 활약했으나, 얼마 후엔 잡지시대에서 대본소용 단행본시대로 접어들어 많은 조제품이 남발되어 사회문제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소년세계》 《새벗》 《학원》 《학생계》 등에는 안의섭의 《두꺼비 A ·B곡》, 김성환의 《꺼꾸리군 ·장다리군》 《세모돌이 ·네모돌이》 《소케트군》 등이 연재되었다.

    또 신동헌은 최초로 장편만화 《홍길동》을 제작상영함으로써 만화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호피와 차돌바위》로 이어졌으나 기업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했다. 김종래의 극화 《도망자》 《암행어사》에 이어 고우영(高羽榮)은 극화 스타일로 꾸준히 《일간스포츠》지에 《임꺽정》 《일지매(一枝梅)》를 연재했고, 이두호의 《머털도사와 또매》 《장독대》,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등은 무술극화를 정착시켰고, 박수동(朴水東)은 독특한 선으로 《고인돌》을 《선데이서울》 등에 장기간 연재하였다. 《엄마찾아 3만리》의 김종래, 《라이파이》의 김산호의 단행본 시대를 거쳐서 각 일간지들은 어린이와 중학생 상대로 《소년조선일보》 《소년동아일보》 《소년한국일보》를 발행했는데 김박(金博) ·김세환(金世煥) ·김삼(金森) 등이 참여하였다. 《동아일보》에 이홍우(李泓雨)가 《나대로선생》을, 《일간스포츠》에 허어(許漁)가 《미스터 펀치》를 연재하였다.

    어린이잡지에서는 김수정이 《아기공룡 둘리》로 명성을 얻었고 주간만화잡지와 스포츠신문에서는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와 《로보트 태권 V》의 김형배, 《변금련》의 배금택, 《악동이》의 이희재와 《각시탈》의 허영만, 《신손자병법》의 한희작,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가 유명하다. 단체로는 1958년 김용환 ·신동헌이 주도한 한국만화가협회와 김성환 ·안의섭이 주도한 현대만화가협회가 각각 만화가협회전과 문화단체와의 야구경기 등 행사를 많이 해왔으나, 5 ·16쿠데타 후에 와해되었고, 68년 아동만화가협회가 이상호를 회장으로 발족된 후, 77년 극화분야와 어린이신문 관계 만화가까지 망라하여 만화가협회로 개칭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겨레신문》이 발행되면서 박재동의 《한겨레그림판》과 《경향신문》의 김상택의 《시사 희평》이 유명하고 《한국일보》의 심민섭의 《심마니》도 유명하다.

    5. 동향
    만화잡지로 창간 140년이나 되는 영국의 《펀치:PUNCH》지는 우수한 작가들을 일간신문잡지들에 빼앗김으로써 일시 자진 정간을 할 정도로 경영이 부진하여 과거와 같이 개각(改閣)에 영향을 끼치던 시기는 지났다는 말을 듣다가, 급기야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많은 신문지상에 여전히 시사만화가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국에서는 돈, 마틴 등 블랙유머작가가 주축을 이룬 《매드:MAD》와 이와 유사한 형식의 만화잡지로 공상과학물 만화가 성행하였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여전히 신문지상에 만화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고급 시사만화잡지계열의 것은 영국과 같이 차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만 순수 유머만화로 엮어진 단행본과 에로만화를 주축으로 편집된 만화잡지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현대의 기계문명 속에서 지쳐버린 현대인들의 가벼운 휴식의 방편으로 스포츠와 더불어 만화를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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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의 만화가 시작된것은 1909년 부터 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의 기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로 18세기 초 즉 일제 시대 전에 그려진 "의열도"라는 시대풍자 만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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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병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9 년 6월 2일 창간되었던 대한민보 신문에 게재되었던 삽화형태의 시사만화를 대한민국최소의 만화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림작가는 이도영화백이며, 한일합방때 폐간될때까지 그림이 실렸으며,

    그후 1924년 멍텅구리 헛물켜기 라는 4컷형식의 만화가 탄생했으며, 독립된 책형식으로 출간된 만화책으로는 김용환화백의 '흥부와놀부, 토끼와 원숭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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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만화는 1909년 6월 『대한민보』에 실린 한 칸의 삽화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시사만화, 어린이만화, 만화잡지 등이 본격적으로 생겨났고, 50년대 후반 생겨난 만화방이 6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240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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