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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우
누우우23.02.03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 사건과 그 과정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임무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인 출인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가게 된 과정과 사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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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던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조사 내용 알려드려요~

    1979년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또 공수부대를 부산과 마산에 투입하여 그 지역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부마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될 즈음, 즉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박정희 시해는 당시의 정치권력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소위 유신정권은 박정희 대통령 1인 중심의 체제였다. 그 밑에서 군부와 공화당 그리고 정부관료가 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다. 박정희 시해 이후 군부와 공화당, 정부관료들 사이에 권력의 향방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국무총리 최규하는 헌법에 정해진 권력계승 순위에 따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외형상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체제가 갖추어졌으나 최고권력을 행사하던 박정희 중심의 권력체계에서 그 핵심이 무너지자 권력구조에 힘의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정부는 위기상항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계엄령을 실시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계엄령하에서 힘의 중심은 최규하(崔圭夏)정부를 지원한 군부쪽에 있었다. 군부는 계엄령을 수행하는 물리적 군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장악하였다. 10·26직후 군부는 외형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취하고 있었으며 평온하였다. 그러나 군내에서 국가권력의 향방을 두고서 권력투쟁양상을 보였다. 즉 군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육사 10기 이내의 진영과 육사 출신의 11기 이하 진영간에 갈등과 대립이 그것이다. 이것은 1979년 11월

    2일자 ≪뉴욕타임지》는 "한국 군부의 상급 장성들이 10월 29일과 30일 국방부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박정희 독재체제의 유신헌법을 폐기할 것을 비공식적으로 결정했지만 전두환(全斗換) 계엄사합동수사 본부장 등 일부에서는 유신헌법의 조기 폐지에 반대하여 폐지의 시기에 있어서 약간의 대립을 보였다."고 보도하였다. 여기서 군부의 갈등과 대립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즉각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합수부에 의한 김재규 사건의 조사가 계속되었고(11월 6일 전모발표) 중앙 정보부장 서리에 이희성(李熺性)중장이 임명되어 중앙정보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등 군단장급 이상의 상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소위 온건파로 분류되어 유신헌법의 폐지 → 새로운 헌법의 제정 → 민선 정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단계는 당시 한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며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부합되었다. 이와 달리 군 강경파 진영은 유신헌법의 조기 철폐를 주장하는 군부 상층부의 주류에 대해 내심 반발하였다. 또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제거될 가능성을 염려하였다. 군 강경파세력의 위기감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의한 이건영(李建榮)과 장태완(張泰玩)이 핵심 보직에 임명되고 전두환의 좌천설이 유포되면서 확대되었다. 이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 강경파 소장 세력들은 자파세력의 포섭이 완료되고 '12·13개각' 하루 전이며 장군 진급 심사결과 발표일인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를 박정희 시해사건의 공범협의로 체포하고 그 외 고급 지휘관들을 무력화시켰다. 미국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테타를 방관하였다. 소장 장교층들이 이 쿠데타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신군부가 군사쿠테타에 성공하였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정부가 제시한 유신헌법의 폐지 → 새로운 헌법의 제정 → 민선정부의 수립의 단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정국은 안개정국으로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12·12사태는 정치세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최규하정권은 형식적 존재에 불과하였고 군부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의 변화는 군부의 움직임에 달려있게 되었다.

    한편 일반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 → 새로운 헌법의 제정 → 민선 정부의 수립의 정치일정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결국 일반국민과 신군부 사이에 정치일정의 진행을 둘러싸고 대립 갈등의 가능성이 커졌다.

    10·26 이후 한때 형성되었던 군부내의 대립은 정승화 세력이 숙청되면서 끝났다. 그 대신 전두환 진영이 군부를 장악하여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제 한국정치의 주도권은 신군부의 핵심으로 등장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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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가의 실권을 차지하고, 최규하 대통령 하야 이후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간접선거)로 1980년 11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투표 없이 당선된 건 아니고 투표를 하긴 했는데,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형식적 선거였습니다.


    그 후 유신헌법을 개헌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고, 새 헌법에 따라 다시 대통령선거를 치루어 1981년 7년 임기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이때도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체육관 간접 선거였고, 단지 선거인단 이름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전두환은 1980~1987년까지 8년 집권합니다. 원래는 간선제를 바탕으로 퇴임 후에도 계속 자신의 허수아비를 세워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었는데, 국민들이 대통령 간선제 유지하겠다는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일으키자 이에 굴복하여 현행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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