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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7.10

명나라 영락제의 업적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명나라 영락제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하고 수도까지 옮겼잖아요.

영락제 하면 자금성과 피의 숙청이 떠오르는데요.

정치적으로는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한데 업적은 무엇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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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제도 폐지, 전국에 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까지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했으며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시설 보완, 대운하를 개수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 이방원이 두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기에 세종 대 조선의 문화가 꽃필 수 있었듯 영락제도 황제권을 확립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명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자금성을 만들고 가장 유명한 업적은 역시 정화의 원정을 꼽을 수 있겠네요.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서안까지 정화의 원정길이 닿았는데 이를 통해 명의 국력을 알릴 수 있었지요. 유럽국가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할 때 선박보다 훨씬 크고 인원도 많았다고 합니다. 다만 정복활동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조공을 받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락제의 업적이 궁금하군요.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다만 《영락대전》은 먼 훗날 외세의 침입으로 탈탈 털려 지금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습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明)의 제3대 황제(재위 1402~24). 이름 주체. 연호는 영락(永乐). 묘호 태종(太宗, 후의 成祖). 시호는 문제(文帝). 영락제(永乐帝)는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26명 왕자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으며,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에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명을 건국하며 1370년 10세에 연왕(燕王)에 봉해졌고 1380년 20세가 되어 베이징을 근거지로 하여 국경지역에서 전쟁경험을 쌓았으며 1393년 북부 국경을 지키는 수비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1392년에 황태자가 죽자, 황태자의 15세 아들이 후계자로 지명되며 1395, 1398년에 두 형의 사망 및 1398년 홍무제(洪武帝)의 사망 후, 연왕(燕王)은 신 황제인 조카 건문제(建文帝)의 지방권력 약화정책에 반발하여 1399년 8월 반란을 일으켰고 1402년 7월에 궁정의 환관(宦官)들이 연왕(燕王)의 군대와 내통하여 난징(南京, 남경)이 함락되면서 연왕(燕王)이 제위에 올랐다.


    영락제 시대의 개혁정책은 번왕의 권력을 축소하는 것으로 번왕들을 전략적 요충지에서 중부와 남부 지방으로 옮기고, 행정권을 박탈하여 이후 명은 번왕의 봉기로 인한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영락제는 권력을 강화하고 젊은이들을 중용했으며, 환관(宦官)에게 외교사절, 감독관, 수비대 등에 대한 감찰권을 부여하고, 1420년에는 동창(东敞)을 만들어 반역활동 색출의 임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영락제의 재위기간 중 강력한 정책으로 정치·사회·경제는 대체로 안정되었으며, 특히 1만 1,000권이 넘는 영락대전(永乐大典)이라는 기념비적인 문헌집 발간을 후원하였다.


    또한 영락제는 1403년 환관들이 이끄는 3개 함대를 파견하였으며, 특히 환관 정화(郑和)는 1405~33년 함대를 이끌고 7차례나 항해하여 페르시아 만과 홍해 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최소한 37개 나라를 방문하였다. 1407년에는 난징(南京, 남경)에서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여, 1420년에 궁전이 완공되자, 1421년 천도를 실시하였으며, 1424년 몽고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병에 걸려 그해 8월에 진중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아들이 홍희제(洪熙帝)로 등극하였다.

    출처 :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