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마병은 언제 없어졌나요?
조선건국 초기에 이성계가 이끄는 기마병이 강력했고 국경지방에 여진족을 격퇴할때도 자주 쓰였다고 하던데 조선중기부터 기마병이 역사에 잘 안나오네요. 왜 없어진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정책적으로 궁기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 또한 마상궁술을 중시 여겼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일부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링크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논문
서유럽의 카라콜 등장처럼,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머스킷이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다.출처: 나무위키 기병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병의 화력이 우세해지는 시점에서 기병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전차의 출현으로 기병대를 쇠퇴시켰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마병은 조선 시대 뿐 아니라 전세계 적으로 15-16세기 총의 발달로 인해서 자연 스럽게 사라 지게 됩니다. 화약 무기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다연발 총 즉, 재장전의 시간이 혁명적으로 진보되면서 기병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선 중기( 15-16세기) 이후로 기마병이 사라진 이유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병은 1882년 6월 훈련도감 군병이 주도한 임오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된 이후 훈련도감의 기능이 마비되고 이를 대체할 군영으로 친군영(親軍營)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sillok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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