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과의 관련은 고구려때 부터이나 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이때 거란도 부족분열 상태로부터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했고,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 후 916년 요나라를 건국,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으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 금수지국이라 부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합니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입니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졌고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 30만명을 양성, 광종때에는 서북쪽에 맹산, 숙천, 박천, 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는 영흥, 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또 광군을 광군사로 개편하는 등 거한의 침입에 대비,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합니다.
979년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가 985년 고려에 한국화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 ,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이므로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요 태종이 오대의 첫번째인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끼어들어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리나 끝내 중국 남침에 실패하고 급사,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싸움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으니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었습니다.
요 성정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991년 위구, 진화, 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