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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나
잠이나23.07.30

무속신앙이 국가의 정식 계급으로 인식되었다가 조선에서 천시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각종 무속행사 고려시대의 팔관회처럼 무속신앙과 관련된 국가 행사가 있었고 이들은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 받았는데 이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정식적인 사회계급이 아닌 탄압과 홀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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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30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된 것과는 달리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되었으나, 금무(禁巫)라는 국가정책에 따라서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다소 제한되었다. 특히, 무격을 전담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星宿廳) · 활인서(活人署) 등이 있었다.


    또, 기우 · 기은 · 기자 · 산천제 · 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아서 하였으며,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시대 못지 않게 성행하였다. 건국 초 태조는 원단(圓壇)을 한강 서쪽에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하였으며, 마니산에 단을 설치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영성단과 노인성단(老人星壇)을 서울 남쪽에 두었다. 태백성은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기 전에 빌었더니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등극한 뒤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어 매년 단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산신제는 백악산 · 송악산 · 감악산 ·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밖에도 천신(川神) · 삼해신(三海神) · 칠독신(七瀆神)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다. 산신과 연관되어 암석신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토착화되었다.


    대표적인 기자암(祈子巖)으로는 경주 금오산의 산아당암(産兒堂巖)과 상사암(想思巖),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과 인왕산 선바위 등을 들 수 있다.

    동물신으로는 산군(山君)이라 하여 산신으로 숭상하였던 호랑이를 비롯하여, 재산신으로 숭상되었던 두꺼비, 제주도 차귀당(遮歸堂)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신(蛇神),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또, 수목 하나하나에도 신령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오래된 거목의 수정(樹精)은 신수라고 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마을 안에 있는 거괴수(巨槐樹)는 당신목(堂神木)으로 숭상하였으며, 서낭당 · 산신당 · 장승 근처에 있는 수목들은 신목으로 인정되어 벌채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가택 안에 좌정한 많은 가택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집안의 신들 중에서 가장 높아서 대들보 위에 있는 성주신은 집안의 평안 · 무병 · 장수 · 행운 · 다남 등을 관장하는 매우 중요한 신으로 섬겨져서 상달인 10월에 성주굿이 열렸다.

    이 밖에도 지신이라고 불리는 토주신(土主神), 재산신인 사창신(司倉神), 곡식을 관장하는 제석신(帝釋神), 부뚜막신인 조왕신(竈王神), 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수문신(守門神), 변소의 신인 측신(厠神), 천연두의 방지를 위하여 모신 역신(疫神) 등이 신봉되었다. 이들 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방법과 의식, 민속 등이 전래되고 있다.


    또, 수호신으로는 고려 때와 같이 서낭 · 장승 · 소도 등을 모셨는데 이 중 서낭의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전국의 명산을 비롯하여 마을 입구,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서낭당이 있었다.


    이 밖에 부근신(付根神) · 대감신(大監神) · 풍신(風神) · 태자귀(太子鬼) · 미명귀(未命鬼) · 야광귀(夜光鬼) · 도깨비 등에 대한 다양한 속신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근신은 부군신(府君神)이라고도 하는데, 중종 때는 전국의 사내(司內)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대감신은 무격신으로서 전내대감(殿內大監) · 토주대감 등 10여 종으로 분류되며, 풍신은 영동할머니로서 2월 1일 천계에서 지상에 하강하였다가 20일에 승천한다고 전한다. 태자귀는 명두라고도 하는데 어린아이의 죽은 영혼을 신으로 삼으며, 점이 잘 맞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많이 신앙하였다.


    미명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세상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사람에게 붙은 경우로서 악행을 많이 하는 악귀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위령제를 지내주어 미명귀가 되는 것을 예방하였다. 특히, 민간의 전설에는 이 미명귀에 얽힌 것들이 많다.


    야광귀는 천계에 살다가 설날 밤에 인가로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간다고 하여 설날 밤에는 뜰에 있는 신발을 모두 방 안에 감추어 두고 잔다. 이 야광귀에게 신을 잃은 사람은 연중 불길하고 흉사가 있다고 하며, 이 귀신을 막기 위하여 뜰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체를 달아매어 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하였던 민간신앙은 개화기 서구문물의 유입과 함께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무당의 의술적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고, 1910년 이후 일본은 고유신앙을 일소하기 위하여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미신타파를 주장하였고, 무당이나 점복사에 대하여 엄한 강압을 가하였으며, 마을의 동제를 중단시키거나 신사를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3 · 1운동 이후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산신제 · 기우제 · 별신제 등의 제사와 석전(石戰) · 차전(車戰) 등의 민속놀이까지 위생과 치안을 이유로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 36년을 거쳐 8 · 15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뒤 서구의 교육방법과 생활방법에 크게 영향을 받아 민간신앙은 현대생활 속에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굿이나 마을신앙, 우리 것을 찾겠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서 민간신앙의 원형이 다시 복구되고 계승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은 민족의 향수와 같은 것으로서 완전히 축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토정비결을 보고 산신제를 지내며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고 점을 치며 귀신을 두려워하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는 등 민속명절을 지키고 따르는 것도 민족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민간신앙의 향수라고 볼 수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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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지배 권력이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통해 노골적으로 무속을 탄압하였습니다. 조선 세종 시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시작되며 무당들도 도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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