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인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은 1804년에 프랑스군 최초의 제국 원수 18명중 한명에 뽑혔으며 1808년에는 발미 공작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요.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은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후일 시의원이 되는 장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과 마리 마들렌 뒤르의 7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켈레르만 가문은 본래 작센 출신의 상인 가문으로 17세기 말 엽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켈레르만의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습니다.
켈레르만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어릴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행정관이나 법률가보다 군인이 되길 바랐습니다.
켈레르만은 로벤달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자원입대해 군 생활을 시작, 1752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7년 전쟁 때 프로이센군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고 종전 후 외교 업무를 맡아 폴란드를 방문, 이때의 경험으로 켈레르만은 1771년 바르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장교단의 일원으로 선발될수 있었고 크라쿠프를 탈환하고 티니에츠에서 아군의 퇴로를 엄호하는데 기여해 생루이 훈장 슈발리에를 수훈받았으며 1788년 준장으로 진급함으로써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의 원ㅅ들 중 프랑스 혁명 이전에 장성으로 진급한 유일한 인물이 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켈레르만은 혁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1791년 2월 오랭 주 주둔군사령관 , 4월 바랭 주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켈레르만은 혼란스러운 알자스 지방을 통제하고 란다우 요새를 훌륭하게 재정비한 공적으로 1792년 3월 소장으로 진급, 8월 26일 그는 니콜라 뤼크네 원수의 뒤를 이어 중부군 사령관으로 임명, 9월19일 북부군 사령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 함께 발미 전투에서 승리, 발미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를 혁명전쟁의 영웅으로 만들어 그의 군 경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공이 됩니다.
그러나 11월 14일 켈레르만은 명령불복종 및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정에 기소,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알프스군 사령관직으로 밀려났고 1793년 9월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사르데냐 왕국군을 무찌르고 사보이를 탈환하지만 11월 자코뱅파에 의해 불충성 혐의로 다시 기소되어 13개월동안 수감생활을 합니다.
1794년 7월 자코뱅 정권의 몰락으로 석방된 켈레르만은 알프스군 사령관으로 복직, 1797년 9월 13일 알프스군이 해체된 이후 그는 국민위병과 서부군의 기병총감, 바타비아군 임시사령관 등의 직책을 역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상원의원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켈레르만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는 켈레르만을 용맹하고 활동적이지만 사령관이 될 자질은 없다고 보았으며 켈레르만 또한 나폴레옹은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잡은 야심가일뿐이라 생각, 그러나 나폴레옹은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위해 군부 내의 다양한 세력과 혁명전쟁의 공신들을 포섭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켈레르만도 가문의 번영과 아들의 출세를 위해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은 켈레르만을 제국 원수로 임명, 요하니스베르크의 장원과 콜마르 의원령 등 많은 토지를 하사, 1808년 발미 공작으로 봉해졌습니다.
나폴레옹 전성기, 고령의 켈레르만은 예비군 사령관과 같은 후방 업무를 주로 담당, 1805년~1809년 사이 예비군 제 3군단, 에스파냐 방면군 예비군, 라인군 예비군, 북부군 예비군 사령관을 연이어 맡았고 이후 건강문제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812년 25.26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13년 독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자 켈레르만은 라인군 예비군 사령관이 되어 동부 국경지대로 이동, 그는 라이프치히 전투 직후 마인츠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상병들을 옮기는 일을 담당, 메스에 모여든 패잔병들을 통솔해 샬롱앙샹파뉴에 방어선 구축, 그러나 1814년 1월 나폴레옹은 다른 원수들에게 현장 지휘를 맡기고 켈레르만은 파리로 돌려보냅니다.
1814년 4월 1일 켈레르만은 상원에서 나폴레옹의 퇴위에 찬성, 루이 18세는 그를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 백일천하 때 알들인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이 나폴레옹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것과 달리 늙은 원수는 조용히 자택에서 칩거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한 후 체포된 미셸 네 원수의 사형 판결에 동의, 몇몇 왕당파들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긴 했지만 켈레르만은 왕정복고 시대에 자신의 원수 칭호와 연금, 발미 공작위를 모두 유지할수있었습니다.
1820년 9월 13일 켈레르만은 파리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 그는 자신의 심장을 발미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발미 전투 기념비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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