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석호필) 박사는 어떻게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나요?
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으로 알고있는데요.
그런데 세브란스 의사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 1명 더 추가해 34인의 민족대표라고 불리는데 스코필드 박사는 어떻게 우리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본래 민족대표 33인 다음으로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3.1운동과 제암리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업적 때문입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독립운동을 세계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유실된 원고의 일부가 발굴되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계 캐나다인으로 영일동맹에 속해 일본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던 점이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 4월, 일제의 감시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 처한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이후 1958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 기념일과 정부 수립 10주년 경축식에 국가 대표로 스코필드 박사를 초청하였으며,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자원하여 수의병리학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로맨틱한발발이142님.
세브란스 병원의 초대 원장이자 물리학자인 스코필드(석호필) 박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신문에 보도하고, 이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한국의 독립운동에 집중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담긴 독립선언문을 복사해 세계 각국의 대사관에 전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게 되었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또한 그의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국의 교육과 과학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물리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학교의 기반이 되는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그의 노력과 헌신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과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많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출처 : 연세대학교 역사
궁금증을 해결해드리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