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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한대벌래6
대범한대벌래623.04.21

나당연합 당시 당나라 황재와 황후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660년에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게 되있는데 이때 당나라 황제와 황후(측천무후?)는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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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고종이 황제였으며, 무비랑(측천무후)이 황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의 제3대 황제(재위 649∼683). 당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휘는 치(治).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장손황후의 3남이다.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로, 줄여서 성황제(成皇帝)라고도 부른다.

    그는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토번, 돌궐, 왜)와 전쟁을 한 인물이다.

    당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 씨를 황후로 올리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소 숙비를 총애하게 된다. 이에 왕 황후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하나 내로라하는 명문집안이었던 왕 황후를 장손무기,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그녀를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진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당고종은 감업사로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후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인 이홍을 얻는다. 그리고 653년 왕 황후와 소 숙비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고 왕 황후측은 소 숙비에 대한 당고종의 총애가 멀어지게끔 하기 위해 무미량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 2품 소의(昭儀)에 책봉케 한다. 무슨 늑대를 피하려 호랑이를 들이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왕 황후측의 생각대로 당고종의 총애가 소 숙비에게서 멀어졌지만, 무 소의측이 당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 왕 황후는 무 소의측의 도전을 받는다. 무 소의는 왕 황후와 소 숙비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의 서족들에다 장손무기,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고, 결국 치열한 정치투쟁 끝에 자신의 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7]공신들의 수장 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강등시키고 왕 황후와 소 숙비가 폐서인되고 자결을 명받은 다음 황후로 책봉된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린다.

    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표면상으로는 측천무후의 미모에 홀린 당고종의 잘못된 행동이라 평을 받고 있지만, 속내는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관롱 귀족(사족)세력[8]과 이들에게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서족세력의 정치투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 귀족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것이 최근의 중평이다. 실제로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황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인, 격이 턱없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9] 때문에 측천무후는 당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천진 군벌을 정면 승부를 벌여서 승리했다면 정치의 신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당고종의 심중을 대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출처: 우만위키 당고종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당연합 결성 당시 당나란 황제: 태종 (이세민)

    부인은

    문덕황후장손씨 (长孙氏)(601년3월15일—636년7월28일),小字观音婢 ,하남성 낙양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