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태백을 시선이라 부르고 두보는 시성이라 부를까요?
중국 당나라 시절 뿐만 중국 전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면 이태백과 두보는 포함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태백을 시선, 두보를 시성이라 부르는데 왜 이런 호칭이 붙었을까요?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선은 시를 쓰는 신선이라고 합니다.
이태백이 술을 좋아해서 장강에 비친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고 합니다.
한편 두보는 민중의 시를 쓴 시인입니다.
뼈를 깍는 노고로 시를 쓴 두보는 시성이라 합니디ㅡ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이태백(701~762)은 본명은 이백, 자가 태백입니다. 두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그는 현재 1,10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이들의 시에는 도가적 색채가 짙기 때문에 그는 '시선(詩仙)'으로도 불립니다. 어렸을 때 고향인 사천성에서 지내다가 25세 때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다녔습니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도가적 성향도 이러한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에서 길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죠.
43세 때에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 장안에서 몇년동안 지냈으나, 그의 성격상 궁정의 번잡한 생활은 맞지 않았고, 다시 방랑을 하게 됩니다. 이시절 그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인물이 바로 두보입니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방랑생활을 계속합니다. 그가 강위에서 술을 마시다가 달 그림자를 보고 달을 잡으려다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진실이라기보다 그의 도가적, 낭만적 성향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하겠지요. 그의 작품으로 청평조사(淸平調詞)가 대표적입니다.
두보(712~770)는 자는 자미, 호를 소릉이라 쓰는 사람이며, 이백이 시선이라 불린 것에 대해, 그는 유교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시성(詩聖)'으로 불립니다. 하남성 공현 태생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생몰연도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백과 거의 비슷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는 '개원의 치'라 불리는 당의 중흥시대로부터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가 급격히 쇠퇴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시적 배경 역시 이백과 마찬가지로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 지원했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각지를 방랑하다가 이백 등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방랑생활을 했어도 그는 조상이 두예, 두심언 등 왕조 개창의 공신들이었고, 그런 까닭에 유교적 정서를 버리지 못했던 듯합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이백의 시와 달리 유가적 입장에서의 치국, 평천하의 소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불우하여 양자강 유역을 주유하다 끝내 배안에서 병사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약 1,400여 편의 시가 현존하고 있으며, 유가적 성향이 강했던 까닭에 이후 유교사상을 중시했던 우리나라의 시단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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