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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18

1796년 진산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정약용이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던걸로 아는데요.

1796년 진산 사건 이후에 천주교와 담을 쌓았다고 하는데 진산 사건이 무슨 사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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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이라는 두 선비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입니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예학을 중시하여 이 사건을 매우 위중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은 결국 배교를 한뒤 다시 번복을 해 순교 당합니다. 지산 사건이란 윤지충(尹持忠)은 1759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정약용과는 내종사촌 관계입니다. 24세의 나이로 진시에 합격한 윤지충은 이후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에 갔다오게 되고 거기서 견진성사까지 받고 온다고 합니다.고향인 진산(珍山)으로 내려온 윤지충은 2년 뒤 1791년에 모친상을 맞게 된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유교적 관습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는 뭐했던 것인지, 처음에는 유교적으로 상을 치르고 조문을 받고 혼백도 모셨다고 합니다. 외종사촌이자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인 권상연(權尙然)이 이를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말을 하자윤지충은 생각을 바꿔 모친의 궤연을 뜯고 상복을 불태우고, 조상의 위패까지 전부 없애버린다고 합니다. 얼마 뒤 권상연도 모친상을 맞고 그는 처음부터 조문객도 받지 않고 천주교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유교적 질서가 다스리던 나라였고, 따라서 둘의 행동은 조선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기에 구체적으로, 조선시대때 신주나 시신을 고의적으로 훼손시킬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이를 고발당한 윤지충은 도망쳤으나 자수했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다시 상복을 입고 유교적 예를 갖출 것을 권했으나 그들은 뜻을 꺾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정조의 명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고 전주의 풍남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들이 처형 당한 터에지금은 천주교 전주교군 전동성당세워졌다.) 또한 진산 군수 신사원은 이 일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땅에 유배당했다고 합니다. 한편 같이 체포된 이승훈은 관직을 삭탈당하고,주교 역할을 했던 권일신은 배교하는 것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유배지 이동 중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홍낙민, 최필공,세례자 요한, 정역용,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신앙을 버리겠다는 상소를 올려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약종은 배교를 번복한 뒤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 이라는 두 선비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으로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예학을 중시하여 이 사건을 매우 위중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진산 군수 신사원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공주감영으로 압송, 감사 정민시의 추궁에 위패를 불태웠다고 자백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교리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는 불태운 것인데 정조는 이들의 사형을 명령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는데 진산사건의 전모는 서울로 전해졌으며 정치적인 파장 또한 컸고 정조는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등용했는데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윤지충은 정약용과 외가 친척간이었으며 정약용은 진산사건으로 노론의 정치공세를 받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해박해의 다른 이름이 진산사건입니다. 신해년(1791년)에 전라도 진산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진산사건으로도 불리는 것이죠.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이라는 두 선비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예학을 중시하여 이 사건을 매우 위중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진산 군수 신사원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공주감영으로 압송하였고 감사 정민시(鄭民始)의 추궁에 위패를 불태웠다고 자백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교리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는 불태웠던 것이다. 정조는 이들의 사형을 명령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진산사건의 전모는 서울로 전해졌으며 정치적인 파장 또한 컸다. 정조는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등용하였는데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윤지충은 정약용(丁若鏞)과 외가 친척간이었으며 정약용은 진산사건으로 노론의 정치공세를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珍山事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