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건이 낙타를 굶겨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려의 왕건이 거란으로부터 사신과 함께 온 낙타를 굶겨죽인이유가 무엇인가요?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준의 행위인데 받지않으려면 되돌려보내도 될텐데 어떤 이유로 굶겨죽인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태조 재위 25년이자 요태종 재위 15년차인 942년 10월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화친을 위해 고려에 사신 30명과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내지만 고려는 도리어 요라나의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 이 중 일부는 자살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선물로 데려온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 밑에 묶어 굶겨 죽이는 것으로 화답했습니다.
고려 태조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발해 유민을 위해 거란 사신을 모욕하는 정치적 퍼포먼스입니다. 당시 왕건이 발해계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여 정착시키던 상황이었고, 태조-혜종 재위기간 여러차례 걸쳐 수백의 왕족과 고위급 관리를 비롯한 수만호의 발해인들이 귀부한 상황이었습니다.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당했음으로 발해 출신의 유민들을 다독이려면 또한 그들이 변경지역에 잘 배치되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거란과 적대해야 한다는 퍼포먼스가 필요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42년(고려 태조 25) 거란의 사신을 유배하고 그들이 가져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매달아 굶어죽게 한 사건.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후 낙타교라고 불렸다 한다. 거란은 세력이 커지자 중국을 침입하려는 계획으로, 이에 그 배후에 있는 고려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942년에 거란 태종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고려에 보내왔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거란은 구맹(舊盟)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쳐 멸한 무도한 나라이므로 결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달아 굶어죽게 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태조는 이듬해 지어진 <훈요10조> 가운데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고려 태조가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거란이 <친척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해 분노를 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태조의 북진정책의 의지가 이러한 형태로 표출된 것으로도 보인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