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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7.02

신미양요때 미국은 왜 그냥 돌아갔나요?

신미양요때 미국이 조선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줬다고 하던데 전투후에 한강으로 거슬러오지 않고 왜 그냥 퇴각한건가요?? 조선을 그냥 둔 이유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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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신미양요(1871년) 당시 미국의 타격은 조선(한국)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목적은 미국 선원들의 구출과 미국의 상업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해군 함선이 조선 해안을 공격하고 한양(서울)을 포함한 몇 개의 해안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와 협상하여 미국 선원들의 해방을 이루었으며, 한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신미양요는 미국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촉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국제적인 위상과 평판을 고려하여 한국과의 미사일 전쟁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둘째, 한강으로의 전진은 미국 해군에게 추가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군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미국 해군 함선은 한국 해안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조선은 신미양요를 한미 우호의 계기로 삼고, 미국과의 외교적 및 상업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 되셨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미군은 해상에서 포를 쏘아 조선군에게 피해를 입힌것 입니다. 미군이 철수를 한 주된 이유는 미군이 조선군과의 지상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선 앞서있었던 병인양요를 자세히 살펴 보면 병인양요는 근대에 들어서 아시아 국가가 서구 세계, 그것도 프량스와 전투를 벌여서 일구어낸 최초의 승리였기에 미국도 충분히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주청 전권 공사 F. F. 로우(F. F. Law)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J. Rodgers)는 군함 5척, 함재 대포 85문, 해군과 육전 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1871년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을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南陽灣)[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서안에 있는 좁고 긴 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勿淄島)[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작약도(芍藥島)의 조선 시대 이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이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보(廣城堡)[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보(鎭堡)]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오히려 조선 정부에 사과와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고,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 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설치된 진(鎭)]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덕진진(德津鎭)[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진], 광성보(廣城堡)[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보]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