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남아 있는 백제 고분의 수와 분포는 어떻게 되나요?
백제는 여러 번 천도를 해서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서울), 공주, 부여 등지에 백제의 고분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 수와 분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 고분 유물]
백제 고분 역시 많은 양의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경우가 드물다. 한성기(3세기 중·후엽~475년)에는 다양한 묘제가 등장하는데 출토 유물의 양상도 지역마다 판이하다. 동일한 묘제를 사용한 지역 간에도 출토 유물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수혈식석곽묘로 구성된 화성 백곡리와 마하리, 천안 용원리, 논산 표정리, 금산 수당리 고분군에서도 지역 간 차이가 보여서토기 부장이 중심인 경우(마하리), 철제 무기의 부장이 현저한 경우(백곡리), 금동관과 동진제 흑유계수호, 용문환두대도 등 중앙산 착장형 위세품과 외래 기성품이 출토되는 경우(용원리), 부장품이 매우 적은 경우(표정리)가섞여 있다. 수당리 고분군은 토기 부장이 1~2점에 그치는 반면 철제 무기와 철정의 부장 빈도가 높은 편이다. 화성 요리, 원주 법천리, 천안 용원리,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 안동 고분 등 지방 수장묘에서는 금동관과 신발, 중국산 도자기 등의 물품이 부장된다. 하지만 묘제의 차이는 물론이고 부장 양상에서도 뚜렷한 지역색을 보인다. 예를 들어 길두리 고분에서는 왜계의 철제 갑옷과 투구가 부장된 반면, 토기는 전혀 부장되지 않는다. 입점리 1호분은 횡혈식석실묘와 토기의 부장 양상 등에서 중앙 묘장제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웅진기 백제 왕족들의 무덤이 분포하는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횡혈식석실분과 전실묘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극심한 도굴을 당하여 부장품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데 한성기와 마찬가지로 유물 부장량은 매우 적어서 토기의 다량 부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장신구 위주의 부장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무령왕릉만은 예외적으로 많은 양의 중국 청자, 금속기와 함께 귀금속제 장신구가 다량 출토되었다. 사비기의 고분이 집중 분포하는 부여 지역에서는 조사된 고분의 수에 비해 부장품의 양은 소량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극단적인 박장에 있다. 은제 화형관식(花形冠飾)과 철테 등 관과 관련된 것, 대금구(帶金具) 등이 부장되는 정도에 불과하며 토기의 부장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목관, 목곽도 있지만 전용 옹관의 발전이 현저한데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신발이 발견되며, 철제 무기와 공구 등이 비교적 다량 부장되어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토기 몇 점에 그치는 양상을 보인다.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알려진 전방후원분에서는 재지(在地) 토기, 중앙산 위세품, 왜(倭)계 유물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분구나 주구에서 발견되는 원통형 토제품은 일본의 하니와(埴輪)와 상통하지만 형태와 제작 기술은 재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 지역에서도 사비기에 접어들면 사비기 묘장 형태의 파급과 함께 박장의 양상이 현저해진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비도성 일대 고분군은 도성에서의 거리와 자연지형, 고분군 내 고분 수와 시기 분포, 중요 유물 양상, 유적 내와 인근에 중요 취락 존재 여부 등에 따라 A~D군의 분포정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성 바로 바깥에 위치하며, 큰 봉분도 존재하고, 대부분 잘 치석된 횡혈식석실묘가 축조된 능산리고분군은 A군으로, 이는 동쪽지역에만 있다. B~D군은 동쪽, 서북쪽과 서쪽, 남쪽 지역에서모두 확인된다. 그중 D군은 고분의 수나 내용이 백제 사비기에 집중되기보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로 계기적으로 이어지는 점으로 볼 때 사비도성과 연계되기보다는 다른 중심지가 상정된다.
-출처:한국학술지인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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