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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비둘기23.03.03

희대의 악녀를 꼽으면 서태후가 꼭 꼽히는데 서태후가 한 악행들은 어떤일들이 있나요?

희대의 악녀를 꼽으라고하면 늘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서태후 일듯합니다. 수많은 악행들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서태후가 행한 악행들은 어떤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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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0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희대의 악녀 서태후는 사치스러움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 끼의 식사로 산해진미를 차려야 했고,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먹는 경우가 없었다. 한 끼 식사 비용은 일반 서민들의 일년치에 맞먹는 액수였다.
    그녀의 탐욕을 보여주는 사례 중에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여름 별장 ‘이화원(颐和园)’이다. 이화원의 면적은 2.9㎢이고 이 중에 3/4인 2.2㎢가 호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호수가 쿤밍호다. 그리고 이화원에는 60m 높이의 만수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쿤밍호는 온전히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고, 호수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만수산이다. 동원된 연인원이 무려 30만 명이라고 한다.
    뛰어난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이 이화원은 서태후의 사치로 인한 백성들의 고혈이 응축되어 있지만, 더 큰 사회적 충격은 이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서태후는 이화원을 짓기 위해 북양함대 예산을 유용했다. 이화원 공사에 쓰인 돈은 은전 3000만냥이었다. 이 액수는 당시 청나라 1년 전체 예산의 30%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면 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예산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정원 조성에 쓸 돈은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서태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고, 잇따라 중국의 넓은 땅은 서구 열강들로부터 갈갈이 찢기는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출처 : 축산경제신문(http://www.chukkyung.co.kr)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그녀가 비판받는 이유는 권력에 집착하고 탐욕스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중국이 일본처럼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예로들면 태평천국의 난 이후, 권력을 잡은 한인 관료들은 양무운동으로 키운 신식군대를 사실상의 사병집단화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한 목적이 있었기는 하더라도, 외침에 대비한 목적이었죠. 가장 유명한 것이 이홍장의 회군과 증국번의 상군입니다. 증국번은 난이 평정된후 상군을 사실상 해체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홍장은 상군을 베이징이 있는 허베이성 부근에 상주시키고, 근대적인 북양함대의 창설을 시도합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성공하여 당시의 막강한 서양열강(영국, 독일)들도 보유하지 못한 전함을 2척이나 진수하여 보유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원과 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그 어떤 포로도 격침시킬수 없는 장갑함이었죠.

    하지만 주력함이 있다면 보조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보조함을 위한 예산인 은2000만냥을 자신의 여름궁전인 이화원을 만드는데 써버립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광서제가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자신이 실권을 잡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에 접근,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변법자강운동],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으로 피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 일본보다 앞섰던 육,해군의 전력이 일본에 비하여 급감하게 되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서양열강의 반식민지, 그리고 청조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후대의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궁궐 정원인 이화원을 꾸미는 데 집착해 무려 3천만 냥을 썼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낭비는 군비 부족이라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청나라 해군의 전력은 규모 면에서 상당했던 반면 이를 관리하는 증강하는 비용을 제대로 조달하지 않았고 결국 부족하다며 화약 대신 다른 물질을 넣어 관리비를 줄이고 제대로 된 훈련하지 않은 채 전쟁에 나섰다고 하네요. 당연히 청나라의 대참패로 끝이 났습니다. 서태후는 금박이 입혀진 비단 옷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는데요. 금속을 제외하고 옷만 해도 3천여 상자가 하루에 몇 번 씩 바꿔 입는 사치를 보여줬고 한번 입은 옷은 절대 또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태후는 괴팍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신들이나 궁녀들은 서태후의 앞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잘못해서 심기를 건드렸다간 목숨이 날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한 원흉이 바로 서태후 였던 것 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아들과 조카를 허수아비황제로 만들고 자신이 배후에서 수렴청정을 하는 방식으로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둘렀고,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아들의 비까지 죽였으며 조카인 동치제도 암살했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대신이든 혈육이든 가차없이 살육했고, 엄청난 사치를 일삼아 청나라국고를 낭비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는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17살에 자금성 궁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였다. 그녀는 출중한 외모와 말재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녀 시절 서태후는 궁궐에서 고양이를 잃어 슬피 우는 연기를 펼쳐서, 황제인 함풍제의 눈에 들게 되었고, 후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녀는 처음에는 후궁이었으나 유일하게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었는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풍제는 이른 나이에 죽게 된다. 이 때문에 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가 6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아들이 즉위하며 섭정을 하게 된 서태후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권력을 잡은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권력을 휘두른 방법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녀의 재위했던 시절은 19c 말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해 청나라를 강성하게끔 만들었다면 청나라는 그렇게 서양 제국들에 의해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단 사치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황실 역사상 최고라고 하니,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번 살펴보자. 그녀의 밥상에는 주식으로 30가지, 반찬으로 128가지의 산해진미가 올라왔는데 이 한 끼 상차림에 은 100만 냥이 들었다. 은 100만 냥은 당시 중국 농민들의 약 1년 치 식량이었다(지금 돈으로 800만 원). 그녀 혼자 다 먹지도 못한 음식을 차리게 된 이유는 그저 그녀의 엄청난 식탐 때문이었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금박이 입혀진 비단옷을 매우 좋아했고, 옷은 대략 2만여 벌 정도 있어 하루에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보석도 매우 좋아해 머리장식과 그녀의 긴 손톱에 보석으로 장식을 했다고 한다. 사치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별장인 이화원인데, 서태후는 청일전쟁 당시 함대를 만드는 돈을 빼돌려 자신의 별장을 꾸몄다고 한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군비를 빼돌린 것도 기가 막힌데 그것을 자신의 처소 꾸미기에 썼다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렇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도 그녀 곁에는 충언을 해줄 신하 한 명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권력을 잡으며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한 짓부터 볼까. 아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권력을 물려줄 때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들과 권력 다툼을 벌인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은 동태후와 오히려 더 친해지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유언(서태후가 권력 농단을 하려고 하면 그녀를 죽이라) 문서로 그녀가 함부로 행동을 못 하게끔 막아두고 있었다. 제1 황후인 자신과 후궁 출신 황후 서태후 간의 위계질서도 확실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서태후는 잔꾀로 동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아 동태후 스스로 함풍제의 유서를 불사르게 만든다. 자신을 옥죄던 것이 사라진 서태후는 온갖 횡포를 부리게 되는데, 일단 그녀를 믿게 된 동태후를 전병을 보내 죽게 만들고, 아들 동치제가 주색잡기에 빠지게끔 방치한다. 결국 타락의 길로 가버린 아들 동치제는 모후와의 갈등을 주색잡기에 풀었고 그는 20세에 매독으로 죽고 만다. 아들이 죽은 후 서태후는 아들의 아내에게 거짓 죄명을 씌워 죽인다. 이후 그녀는 4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황제로 앉혀놓고 마음껏 권력을 주무른다.



    권력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영원한 권세를 바라던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깨달았는지 몰라도, 유언으로 ‘다시는 여자가 정치하지 못하게 하라’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를 그렇게 한 것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로서가 아닌, '황후'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며 교훈 몇 가지를 얻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