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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코끼리20
친절한코끼리2023.06.16

철종이 정말 농사를 짓다고 왕이된 것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왕 중 철종은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왕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 사실이 맞나요?

왜 왕족이 왕궁에 있지 않고 일반 양민처럼 농사를 짓고 있었는지 궁금하며

이것이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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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고 합니다.

    유배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헌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게 되자

    갑자기 임금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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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은 세도 정치의 희생양이 였습니다. 헌종이 죽고나서 그런데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다른이들을 제치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리 버리한 나이 어린 19세의 이원범을 굳이 다음 왕으로 택했고 수렴청정을 행했다고 합니다. 안동 김씨 세력들이 쉽게 다루기 위해 옹립했다는 추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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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은 자신의 혈족이 저지른 역모(반란죄)사건으로 연좌되어서(옛날에는 가족이 역모죄등의 아주 큰죄를 지으면 다른 가족도 같이 처벌되는 경우도 있었음) 귀양살이는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생활에 여유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무를 해다팔고, 농사를 지으면서 어렵게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인대요

    원래는 정부에서 죄인을 먹여살려야 하는 것이나 귀양이 너무나 장기화 되면서 정부에서도 무심하게 방치를 하다보니까...

    거의 일반백성처럼 되어서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지 않으면은 굶어 죽을 지경까지 처하는 철종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왕의 먼 혈손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천한처지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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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왕위를 이을 왕족이 없어 수소문하던중

    강화도에서 나무꾼을 하던 철종이 왕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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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그렇습니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기에 속칭 '강화도령'이라 불렸으며, 철종의 아버지가 전계대원군 이광인데, 전계대원군의 아버지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이었습니다. 이 은언군이 모반을 꾀했다는 모함에 근거해서 아버지(전계대원군)가 강화도로 쫓겨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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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전계군 이광이다.


    정조 재위기인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권신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신유박해 등을 이유로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순조 30년인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순조 31년)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궁의 아들인 은언군의 첩(전산군부인 이씨)의 아들인 전계군의 서자인 것이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 취급을 받는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되지도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덕완군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封君)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절차상의 문제이고 고종도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아버지나 큰형은 아예 자기가 왕이 된 후 추봉하였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몰락한 종친 신분일지언정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대우 받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조선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죽은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왕족이 아닌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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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종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1844년 형 회평군 명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있었는데 명을 받아 봉영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게 되며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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