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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23.06.04

김구선생님이 암살이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제시제부터 독립이 된이후까지 김구선생님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가장 위대한 인물중에 한분이셨는데 안두희라는 사람에 의해 암살이 되셨다라고 역사책에는 나와있는데 이 암살사건의 이유나 정확한배후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더라구요.


김구선생님께서 암살을 당하게되신 이유그리고 그 배후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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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구 암살 사건은 아직까지도 배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영구 미제 사건입니다

    단, 2001년 국사편찬위가 백범 암살 배후는 미국으로 보인다고 발표하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구암살사건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서예를 하던 도중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합니다.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 김창룡, 장택상, 미국이라는 설이있으나 확실한 것은 실행범이 안두희라는 것 뿐이며 안두희 또한 47년 뒤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둔기에 피살당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족주의자인 김구 김규식 여운형 선생들은 다 암살을 당하고 극좌세력인 박헌영(6.25남침 실패를 구실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됨)과 극우세력인 이승만이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김구선생은 이승만의 지령으로 추정되는 육군대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 당했습니다. 지금도 역사적 실체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이 정적제거를 이유로 암살의 배후가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김구선생은 임시정부를 이끌어오면서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반면 미국에서 주로 독립활동(?)을 주로 했다고 하는 이승만은 국내지지기반이 없었고 둘째는 반민족자처벌특별위원회 활동을 이승만이 무력화(이승만 지지세력이 한민당 즉 친일지주와 자본가들로 구성됨)시킴으로써 나타난 갈등양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배후에 이승만이 있었을것이다.

    안두희가 총으로 김구선생을 쐇다.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 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


    안두희 역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떵떵거렸다. 김구 살해 진상규명은 1960년 4.19 혁명 뒤부터인데, 4월 29일에 한 시민이 안두희의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게 신호탄이었고, 같은 날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 시기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져 6월 26일에 심산 김창숙이 백범 사망 11주기 추모식장에서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죽여라!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인 이승만을 규탄하자!"고 절규했다.


    이에 안두희는 잠적했다가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동월 28일에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에서 시민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럼에도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김구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을 당하며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하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


  •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일제 강점기에서 일본에 대항하고 대한독립을 추구한 민족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1949년 6월 26일에 서울의 용산구 한남동에서 암살당했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암살 사건의 배후와 정황은 여러 가설과 추측이 존재하고 있으며, 명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암살 사건의 배후로는 안두희라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으며, 안두희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두희의 정체와 김구 선생님 암살의 명확한 동기와 배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김구 선생님의 암살은 당시 정치적인 갈등과 분열, 조작 등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 내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김구 선생님과 그의 독립운동 활동은 일부 인물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고 반감을 살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배후와 동기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여러 해석과 이론을 남기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암살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며, 그의 희생과 헌신은 독립 운동의 영웅으로 기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살 사건의 배후와 정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질문과 논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답은 모릅니다. 안두희가 그것을 끝내 말을 안한 상황이니까요.

    다만 정황상

    이승만, 미국등의 견제로 안두희가 암살을 했다는게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김구는 북한이랑 하나의 정부를 만들려고 끝까지 노력을 하였죠.

    이승만이랑 미국은 공산당이랑 대화를 하는것에 거부감이 있었죠.

    이승만 같은 경우도 김구가 만약에 북한이랑 대화를 통해 분단이 아닌 하나의 정부로

    나아가게 하는 역활을 하는거라면 자신의 입지가 축소될꺼란 생각도 가질수 있는 상황이였죠.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 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 에 서울 경교장 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