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고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으며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기때문입니다.
대만도 정벌은 1차 고려 창왕 때 박위가 출정하여 밀양에 당도하여 왜선 50척을 불태우고 대마도에 당도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 포로 100여명을 구출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가 기승을 부리자 태조 이성계는 대마도 2차 정벌을 명하고 군을 출병시켰으나 특별한 사료가 없습니다. 대마도 원정을 결정한 태종은 대마도 사신을 함경도로 보내고 왜구와 내통한다고 의심되는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 355명 충청도 203명 강원도에 33명으로 나눠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달했습니다. 3차 정벌은 세종 1년(1419년)에 상왕 태종의 명에 따라 이종무를 대장군으로 하여 출병하여 병선 227척과 병력 17285명이었고 전투식량은 65일분이었습니다. 모조리 도망가고 없자 작은 적선 129척을 빼앗아 20여척을 나두고 모두 불살라버렸으며 1939호를 불살랐고 114명의 목을 베고 21명을 사로 잡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마도 정벌은 총 3차례에 걸쳐 진행 되었습니다. 1차는 고려말인데 당시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고 합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을 정도로 성공적 이였습니다. 2차가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세종 1년 당시인데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는데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