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는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사에서 비변사는 무슨 역할과 기능을 하는 곳이었나요?
비변사가 설립된 시기는 언제이며
비변사의 변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 국가비상대책 협의기관이자 국정최고의결기관으로, 비국(備局), 주사(籌司)라고도 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임시비상대책기구로 비변사를 만들었는데, 이후 외침이 있을 경우 종종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점차 설치 빈도가 늘어나면서 의정부와 육조를 능가할 정도의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1554년(명종 9) 독립된 합의기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계기로 별도의 청사를 마련하고 관제상의 정식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비록 정일품 아문이기는 했지만, 변방의 군사문제를 협의하는 것으로 업무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사는 물론 정치, 경제, 외교, 문화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의정부와 육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체제는 비변사 중심의 체제로 바뀌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864년(고종 1) 전제왕권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의 속사로 삼고 종래 업무는 의정부와 삼군부(三軍部)로 이관하였다. 비변사의 관원은 별도의 정원이 없는 정일품 도제조, 정이품 이상 제조, 정삼품 당상관 부제조 아래 종육품을 낭청(郎廳)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낭청 중 4명은 문관인데 그중 1명은 병조 무비사(武備司)의 낭관, 나머지는 시종(侍從) 중 선발하여 겸하도록 하였다.
무관 8명은 칠품 이하의 관원이 겸하게 하고, 임기가 지나면 육품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그 밖에 잡무를 맡아보는 서리 16명과 서사 1명, 수직군사, 사령 26명이 있었다. 비변사의 당상관은 시기에 따라서 인원이 달랐고, 반드시 포함되도록 규정된 관직도 자주 변경되었다. 그러나 군사에 정통한 당상관 3명을 선출하여 늘 출근하여 업무를 처리하게 했는데, 이를 유사당상(有司堂上)이라 하였다. 1713년(숙종 39) 이후에는 각도에 한 명씩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두어, 전국의 군사업무를 나누어 담당하도록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비변사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2002.,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시대 국방이나 군사에 관련된 업무를 맡아하는 관청은 병조였고 중요한 일은 최고 기구인 의정부에 보고하여 결정했는데 외적이 쳐들어 오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병조 뿐 아니라 의정부와 6조의 대신, 각 지방의 수령이나 장군들이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 후 회의를 소집하면 이미 늦는다는 지적이 나와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으로 조선 조정은 국방에 관한 대책을 미리 의논하기 위해 중종 때 1517년 새로운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 이때 비변사는 논의가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임시기구의 성격이었습니다.
비변사가 상시적인 정부 기구로 제대로 돌아간 것은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관청과 조직이 전쟁 대책을 세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되자 비변사는 국방,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등 거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 기구가 되며 기능이 강화되며 원래 중요한 나라일을 결정하는 최고 기구였던 의정부나 결정된 일을 집행하는 6조의 기능이 약해졌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비변사의 힘이 너무 크고 다루는 일의 종류나 양도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나 기능이 줄지 않고 조선 후기 최고 기구의 역할을 하던 비변사는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원래의 기능으로 축소되었고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에서 하던 기능 가운데 행정에 관한 일은 의정부, 군사에 관한 일은 삼군부로 넘긴 뒤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 > 조선후기 국가비사대책 협의 기관이자 국정 최고의 의결기관으로 비국, 주사 라고도 하였습니다. 1510년(중종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임시비상대책기구로 비변사를 만들었습니다.
국경변방의 일에 대비하는 기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약칭으로 비국 이라고 합니다.
이후 외침이 있을 경우 종종 비변사를 설치하였으며 점차 설치 빈도가 늘어나면서 의정부와 육조를 능가할정도의 기관으로 서장 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초기 삼포왜란을 비롯한 왜구의 침입의 심각성을 깨닫고 설치한 군사회의기구 입니다. 의정부의 삼정승, 육조의 대신들이 모여 회의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갈수록 그 성격이 변질됩니다. 아무래도 국가의 최고대신들이 모여서 합의하디보니 군사회의 말고도 정치, 행정, 사회, 인사 등 전반적인 문제를 모두 이곳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비변사 한곳에서 모든문제를 회의하고 합의하는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도정치기가 들어서면서 외척들이 의정부를 포함 최고대신들을 독점하면서 비변사의 폐단은 여지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모든문제를 비변사에서 합의하다보니, 세도정치기의 고위 관료들이 모두 외척에서 나와 비변사를 장악하여 모든 정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무르게 된것이죠.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후기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의 기구를 말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입니다. 처음에는 빈번한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의정부와 병조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그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상설 협의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모했습니다. 의정부와 육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행정체계의 문란, 왕권의 상대적 약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폐지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備邊司] 비변사는 조선후기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의 기구이다. 중종 대에 남북 변방에서 발생하는 국방관계의 긴급한 사안을 대처하기 위한 임시기구인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을 고쳐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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