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비변사는 어떠한 기구이고, 어떻게 변천했나요?
조선시대의 비변사라는 기구가 있었습니다.
비변사는 특별할 때에는 역할을 하지 않다가 나라에 큰 전쟁이 날 때 지금의 비상대책본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비변사는 어떠한 기구이고, 어떻게 변천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시대 군국기무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 입니다.
조선 초 정치체제는 정무와 군무를 구분, 조선 전기의 정부 구조가 의정부 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로 변화하는 가운데 군무에 능한 재상계층이 국방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제한되고 병조의 장인 병조판서 역시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이므로 국방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고 군사적 전문성을 구비하고자 한것이 지변사 재상제의 시작이나 성종 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문관만으로 정확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해 변경의 사정에 밝은 종 2품 이상의 무관도 참석하게 해 문관과 군사 방략을 협의하도록 하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이라 합니다.
1554년 정규 관청으로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되고 이듬해 을묘왜변 이후 상설화 되어 청사가 설치, 도제조, 제조, 낭청이 정해집니다. 비변사의 권한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 최고 기구화되어 일반 행정, 정치, 외교, 문화, 경제 등 국내의 일반 행정도 모두 협의 , 결정하게 되어 의정부의 기능은 마비됩니다.
임진왜란 떄부터 의정부와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이 비변사의 관직을 겸하고 ,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한 관원이 비변사에 참여, 그에 따라 사실상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해 행정, 국방, 인사 등이 처리되므로 지나치게 확대된 기능으로 존폐 논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와 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의식으로 1864년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해 외교, 국방, 치안 관계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의정부에 이관, 이듬해 비변사는 의정부에 그 기능과 체계가 완전히 흡수되면서 폐지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삼포왜란 이후 중종 때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으며, 명종 때 을묘왜란 이후 상설기구화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 역할이 강화되었습니다.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리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인사 관리, 재정 등 국가 정책 전반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최고 기구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전후 복구 사업과 후금(청)의 침략,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변사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 결과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변사 체제는 주요 관리들이 비변사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각종 정책을 결정
하면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국정 주도권을 장악한 붕당의 주장이 주 로 관철되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비변사 중심의 국정 운영 체제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면서 비변사는 점차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고종 초 비변사가 축소,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부활하면서 비변사 체제는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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