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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9.23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기마민족은 어느나라였나요?

정주국가로 변하거나 혹은 정주국가에 민족이 복속되어 더이상 기마민족으로 살아가지않게 된 민족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기마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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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리

    동쪽은 만주로부터 서쪽은 중앙아시아와 南러시아를 넘어 헝가리까지 뻗어 있는 유라시아 大草原의 유목민들은 양, 소, 말 등 목축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다. 이들이 기원 전 1000년경부터 騎馬戰士로 바뀐 것은 그 뒤 세계사의 전개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騎馬전술은 그 뒤 약3000년 동안 통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전투기와 戰車가 등장하면서 기마전술의 효능이 종식되었으니 말이다. 소총이 보급되기 시작한 16-18세기까지 유라시아의 유목 騎馬민족은 농경·도시국가에 대해서 항상 전술적으로 優位에 서 있었다.

    평화롭게 살던 유목민들이 기마전사로 바뀌게 되는 동기를 준 것은 농업·도시문명의 발달과 자극이었다. 5-4천년 전에 걸쳐 유라시아 大草原 남쪽 지방, 즉 지중해, 인도, 중앙아시아, 북중국에 걸쳐서 농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문명이 성립되면서 청동제 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 증강되고, 금은보화가 축적되었다. 이런 財寶를 입수하기 위한 무역과 식민지 개척이 활발해졌다.

    이런 변화는 평화롭게 無欲의 상태에서 살던 유목민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이 물질적인 호기심과 욕망을 갖도록 만들었다. 유목민들은 도시문명의 물질문화 가운데, 특히 金銀珠玉과 靑銅 무기 및 車馬具를 탐내게 되었다.

    유목민들은 물질적 욕망이 생겼지만 당장은 이런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인구도, 경제력도 압도적인 농경민족 국가에 비해 조직도, 무기도, 전술도 시원찮은 유목민들이 대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농경민족 국가에서는 車戰이 통용되었다. 말이 이끄는 수레 모양의 전차를 타고 창과 활을 사용하는 車戰은 4-5천년 전에는 步兵을 압도했다. 서기 전 1000년 무렵 지금의 南러시아, 카스피해 연안에서 말 재갈이 발견되었다.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잡으면 말에 사람이 직접 탈 수 있고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騎馬戰術이 등장하는 것이다. 騎馬戰士는 길이 없는 山野를 달릴 수 있어 보병이나 말이 끄는 戰車보다도 유리했다.

    기자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몽골 벨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몽골 말을 자주 탔다. 이 말들이 사람이 올라갈 정도의 산을 기어오를 수 있는 데 놀랐다. 징기즈칸 시대의 기마군단이 천산산맥이나 알타이 산맥을 넘었다. 기원 전 700년 무렵 南러시아 스키타이 유목민 사이에서 鐙子(발걸이)가 발명되면 戰士가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게 된다. 기동성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騎馬전술의 출현이야말로 유목민족의 기마민족화, 그 국가의 형성, 흉노-투르크-몽골계통 大帝國의 출현, 아랍 이스람 세력의 대팽창, 유럽민족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몽골계 기미군단의 인도 정복(무갈제국), 북방기마민족의 중국 정복, 한반도의 삼국시대 정립,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 등에 기본 動力과 계기가 되는 것이다. 騎馬전술의 발명은 핵무기 발견과 소유가 국제정세에 끼친 영향과 비슷하지만 핵무기와는 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넓고 깊고 오랜 일대변화를 인류사에 미친 것이다.

    이 騎馬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草原에 말을 맡겨 기르고 悠悠自適(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내게 되어 있어 생산에 신경쓰지 않고 종일 말을 달리면서 기마전술을 익히고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草地를 따라서 가축을 이끌고 이동하는 생활에 젖어 있었으므로 고향이나 주거지에 대한 미련 없이 언제라도 작전상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신속 기동을 가능하게 했다. 유목민들은 또 「걸아다니는 통조림」인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牛車에 싣고 다니면서 작전하기 좋은 곳에 배치하는 등 언제라도 진격과 퇴각이 가능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과 음식도 기동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 바로 軍裝으로 쓰일 수 있었다. 동물과 자연을 벗삼아 酷寒과 酷暑 속에서 살아온 강건한 육체는 더할 수 없는 병기였다. 기마전술과 유목사회의 결합은 최고의 戰士집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의 완비였다. 요컨대 기마전술은 유목민의 생리에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목민이 농경민족화되어 살게 되면 기마전술은 잊혀지거나 쇠퇴해버린다. 농경민족들은 우선 그 많은 말들을 기를 草原을 찾을 수 없었다. 기마민족들의 정복왕조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때는 기마전술이 활발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 騎馬군대는 거의 사라지고마는 이유도 騎馬와 농경은 생리가 잘 맞지 않은 탓이었다.

    기마민족이 군대와 국가를 만들어 힘을 쓰려면 우선 인간을 모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농경민족 군대는 영원불멸의 땅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일이지만 일정한 주거가 없이 항상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기마전사들의 경우엔 사람을 모으는 것이 군대조직의 急先務였다. 유목사회는 사람을 모아 조직을 만드는 데는 불리했다. 사람들은 가축을 몰고 다니면서 광대한 초원에 흩어져 가족단위로 독자적인 생활을 한다. 이런 사람들을 한데 모아 군대와 국가를 만드다는 것은 유목민들의 생리에는 맞지 않았다. 유목민들을 모아 군대와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경제적 이득.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戰士로서 싸우는 것이 득이 된다는 계산이 있어야 했다. 다른 하나는 조직의 주체가 병력이든 권력이든 강제력을 행사하여 유목민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것이었다. 군대와 국가는 유목민의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군대와 국가는 극히 인위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유목민의 군대가 농경민을 상대로 벌인 약탈 전쟁의 성과가 목축 생산물을 능가한다면 군대는 유지되지만 밑돌 때는 기마전사들이 군대 또는 국가라는 조직에서 탈퇴하여 유목민의 상태로 복귀한다. 애국심보다는 타산으로로 뭉친 조직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되면 기마민족국가는 갑자기 붕괴하여 사라진다. 기마민족국가는 영토 개념이 약하고 집단개념이 강하다.


  • 안녕하세요. 향기로운듀공99입니다.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징기츠칸의 후예인 몽골족이다 현재도 초원에서 유목생활을하며 축제대 기마대회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