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형제는 전부 천주교신자였나요?
정약용의 첫째형은 천주교신자로 능지형으로 순교했고 정약용과 각별했다는 둘째형도 천주교 신자였는데 정약용의 형제들은 전부 천주교신자였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 집안이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맏이인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체포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신유박해때 참수형을 당한 정약종,
흑산도로 유배되어 15년동안 동생을
기다리다가 결국 정약용이 있는 강진을 바라보다 죽어간 정약전, 모두 천주교
신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의 이복 형인 정약현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당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큰형 정약현 말고는 모든 집안 사람들이 전부 다 천주교 신자 입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1784년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 서울 명례방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참형을 당하고 순교당했습니다. 정약용의 맏형은 정약현(丁若鉉. 1752~1821)이다. 정약현의 부인의 동생은 이벽인데 이벽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조선 천주교 교단 조직을 결성해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약현은 훗날 백서(帛書) 사건의 주인공인 황사영(黃嗣永)을 사위로 들였는데 그러나 정약현은 끝까지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고 합니다.
정약용 형제의 둘째는 정약전입니다. 천주교를 신봉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갔으며 그곳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습니다. .셋째는 정약종 입니다. 정약용 형제 가운데 천주교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인 정약종은 1800년경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정리한 천주교 교리서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 책은 천주교가 보통 백성들 속으로 파고 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당시 정약종은 천주교의 교리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었다. 또한 평신도 모임을 이끌어 천주교의 대중화와 일상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 아들 정하상(丁夏祥)과 정철상(丁哲祥), 딸 정정혜(丁情惠)는 모두 신유박해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때 순교함으로써 정약종의 가족은 모두 순교자가 되었는데 유례가 없는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