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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4.02.05

경종이 신축환국을 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조선의 경종은 왕이 되고나서도 노론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노론세력이 아주 박살나도록 신하들을 유배보내고, 삭탈관직 했다고 하는데 무슨 일로 눈치만 보던 왕이 이렇게 변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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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축환국은 경종 1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권력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넘어가는 계기게 되었습니다.

    경종이 왕이 되기 전부터 당쟁으로 권력의 암투가 계속 되고 있었던 차에 숙종이 죽고, 경종이 왕이 되었습니다.

    경종이 왕이 되었을때, 경종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노론측에서 왕세자를 세울것을 주청하였고 이것이 관철 되었습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노론은 왕의 대리청정까지 요구합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경종은 소론과 함께 노론을 축출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축환국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축옥사는는 1721년(경종 1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입니다. 사건의 배경은 경종이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어 노론이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노론 4대신이 경종에게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론파 조태구와 유봉휘가 이를 노론의 주장을 부당하며, 경종에 대한 불충이라고 상소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이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렇게 경종이 강하게 돌변하여 노론에 대해 강경한 입정으로 이유는 목호룡의 고변때문입니다. 고변의 내용은 노론측이 경종을 시해하려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 대 후반 노론 우위의 정국에서 1718년 왕과 노론 측 이이명과 독대가 행해졌는데 이 사건은 숙종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증폭시켰습니다. 당시 노론 측에서는 독대를 통해 왕의 특병이 있었다고 하여 대리 청정하는 세자를 보필하는 한편 나중을 대비해 연잉군과 연령군 두 왕자의 보호를 자처해 이전까지 사문 시비위주로 전개되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은 왕위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충역의 시비 분쟁으로 변하게 됩니다.

    경종 즉위 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를 넘겼는데도 아직 후사가 없는 것을 문제 삼아 왕세제의 책봉을 추진합니다. 1721년 8월 20일 정언이정소가 상소하여 저사, 즉 왕세자를 세울 것을 요정하기 시작합니다.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노론측의 요구가 거세지고 경종은 이를 윤허합니다.

    왕대비인 인원왕후는 언문 교서를 내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당시 왕인 경종과 연잉군 뿐이라는 삼종혈맥을 내세워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당시 소론 측에서는 왕세제 책봉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었고, 다만 책봉 과정에서 소론 측 신료들이 배제된 것을 문제 삼으며 논란을 제기했는데 이 와중에 같은 해 10월 10일 조성복이 상소하여 왕세제에게 서무를 대리하도록 하자고 하여 이를 통해 경종에게 정무를 놓게 하려 했습니다.

    이 문제로 노론과 소론은 정면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21년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가 넘었는데 후계자가 없자 왕세제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고 왕세제의 책봉과 관련된 노론 측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나, 이후 노론 측이 추진한 대리청정 요구는 소론 측의 반격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정권이 교체되었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21년 노론 측은 후일 영조에 즉위하는

    왕세제 책봉과 함께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도모하였을 때 소론 측의 반격으로 결국

    대리청정은 실패로 돌아가며 노론은 정계에서 축출된 과정에서 생긴것이 신축환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