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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용있는불독38
위용있는불독3823.05.06

고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왜 실시했나요?

고려 초기 왕권을 안정시킨 광종이 했던 정책으로 노비안검법이 있습니다. 광종은 어떤 정책 목표를 갖고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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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초기 광종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풀어주는 법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돈으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된 그 때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이라는 많은 수의 아들을 두었던 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외가 탓에 간신히 태조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왕규의 난에서 보듯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 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어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 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

    이 당시 호족은 후삼국끼리 싸우는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필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눌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

    출처: 나무위키 노비안검법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호족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비를 늘려 자신들의 경제적⋅인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왕권을 크게 위협하고 국가의 통치 기반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지향했던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단행하여, 후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었거나 호족 세력에게 눌려 강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의 신분인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족의 토지를 경작하고 사병 역할을 하던 노비를 감소시켜 호족의 인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세금을 내는 양인을 늘려 국가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신장하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호족 출신 인사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심지어 광종의 비인 대목 왕후까지 이 법을 폐지하자고 청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광종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한 후 광종 대의 정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노비안검법은 폐지되었고, 성종 때 노비환천법이 실시되어 해방된 노비 중 다시 노비 신분으로 환원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는 왕건 이래로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하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광종 때 과거제 시행, 사색공복제 제정 등과 함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호족은 후삼국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했거나 그 밖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했고 이런 노비는 호족이 소유한 토지와 함께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국가 입장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제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956년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령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회복시켜 호족에게 귀속되건 세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을 감소시켜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