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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듀공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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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히토바시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일본의 인신공양 풍습에 히토바시라 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그 풍습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왜 그런 일들이 자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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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토바시라, 그 의미를 들어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풍습인 것 같습니다.

    전근대 일본에서 행해졌던 인신공양 풍습으로 댐, 다리 및 성과 같은 대규모 건물 아래 또는 근처에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쳐, 건물이 적의 공격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로 파괴되지 않도록 신들에게 기도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닌토쿠 덴노 재위 11년(323년) 기타카와강과 마무타강이 범람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닌토쿠 덴노의 명으로 코와쿠비는 키타카와 강 급류에 그대로 던져졌고, 이후 사람들이 강의 신에게 곧바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람 1명을 희생한 후 제방이 세워진 뒤 강의 범람이 신기하게도 멈추었는데, 운 좋게도 코로모노 코는 희생을 피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토바시라는 전근대 일본에서 행해졌던 인신공양 풍습으로 댐, 다리 및 성과 같은 대규모 건물 아래 또는 근처에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제물로 바쳐 건물이 적의 공격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파괴되지 않도록 신들에게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히토바시라를 기록한 초기 문헌 중 일본서기가 있으며, 닌토쿠 덴노 재위 11년 기타카와강과 마무타강이 범람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는데, 닌토쿠 덴노는 꿈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게 되는데, 무사시 지방에 사는 코와쿠비라는 사람과 와치 지방에 사는 코로모노 코 라는 사람을 두 강의 신들에게 각각 바쳐야만 범람을 막는 제방을 비로소 세울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후 닌토쿠 덴노의 명으로 코와쿠비는 키타카와 강 급류에 그대로 던져졌고 이후 사람들이 강의 신에게 곧바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그렇게 사람 1명을 희생한 후 제방이 세워진 뒤 강의 범람이 멈추었는데, 운 좋게 코로모노 코는 희생을 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신공양은 인권이란 개념이 희박하던 고대에 지역, 종교, 인종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풍습 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토바시라란 전근대 일본에서 행해졌던 인신공양 풍습으로 댐, 다리 및 성과 같은 대규모 건물 아래 또는 근처에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쳐, 건물이 적의 공격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로 파괴되지 않도록 신들에게 기도하는 행위이다.

    히토바시라를 기록한 초기 문헌 중에는 일본서기가 있다. 닌토쿠 덴노 재위 11년(323년) 기타카와강과 마무타강이 범람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닌토쿠 덴노는 꿈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았는데, 무사시 지방에 사는 '코와쿠비'라는 사람과 와치 지방에 사는 '코로모노 코'라는 사람을 두 강의 신들에게 각각 바쳐야만 범람을 막는 제방을 비로소 세울 수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그 후 닌토쿠 덴노의 명으로 코와쿠비는 키타카와 강 급류에 그대로 던져졌고, 이후 사람들이 강의 신에게 곧바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 1명을 희생한 후 제방이 세워진 뒤 강의 범람이 신기하게도 멈추었는데, 운 좋게도 코로모노 코는 희생을 피했다고 한다.

    또 15세기 무로마치 시대에 씐 강부기(康富記)라는 기록물에서는 '나가라의 히토바시라'라는 유명한 인신공양 사례를 이야기했다. 나가라강을 지날 때 등에 어린 사내를 업고 있던 여인이 붙잡혀 큰 다리가 세워질 곳에 그대로 묻혔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히토바시라와 다른 인신공양 설화는 실제로 행해졌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16세기 후반까지도 일본에서 매우 흔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로 실제 사례임이 확인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설화들 중 많은 경우는 고려와 조선의 인신공양 설화들처럼 뜬소문이거나 각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 심심풀이나 아동 교육, 혹은 상업적 목적으로 지어내 떠돌아다니던 이야기일 것이다.

    히토바시라 풍습 관련 설화는 전근대 일본 지역에서 교량과 같이 복잡하고 위험하며 종종 치수와 관련된 건설에 주로 관련하여 거의 항상 따라다녔다. 종종 히토바시라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자기 희생 정신'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에도 막부의 중앙 집권 체제와 법치 체제가 완성되고 성리학이 보급된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실질적인 공양 행위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으며, 일부 지역들에서는 좀 더 오래 지속되어 하술할 호레키강 치수 사업과 같이 18세기 중반까지 암암리에 이런 행위들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18세기 말~19세기 초가 되면 일본 전역에서 히토바시라 풍습의 명맥이 끊겼다. 이후 쿠로후네 사건과 메이지 유신이 있었던 19세기 중반에는 사라진 옛 풍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