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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08

조선시대 기축옥사는 어떠한 사건인가요?

자료를 찾다가 조선시대 기축옥사라는 사건을 알게 되었는데요.

기축옥사는 어떠한 사건이였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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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입니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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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입니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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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축옥사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입니다.

    1589년 10월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 금구 등지를 내왕하며 무뢰배와 공, 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입니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후 기축년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해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고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교생 조구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들 옥남과 함께 도망해 진안에 숨어있다가 자결합니다.

    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사람 김세겸, 박연령, 이기, 이광수, 변숭복 등이 공보했다고 자백,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 당합니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됩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서인인 정철이 옥사를 엄히 다스려 이발, 이길 ,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홍종록, 정언지, 정창연 등 당시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됩니다.

    그 가운데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가 고문을 받다 죽었고 그의 형제 , 노모 , 자식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같은 해 12월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로 나사침, 나덕명, 나덕준, 정인홍, 한효순, 정개청, 유종지, 김우굉, 윤의중, 유몽정, 조대중, 우성전, 남언경 등 30여인이 연루되어 처형, 유배되며,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으므로 그 뒤부터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며 호남 지역 사류간 반복과 대립이 후대까지 이어져 여러 문제를 낳게 됩니다.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은 모주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으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뒤 약 3년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 이 문제는 그뒤 당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됩니다.

    이 옥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지는데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설

    당시 위관으로 있던 정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 이이가 죽은 후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오느 정도 인정된다고 보는 설 등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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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동인계 1000명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원래 정여랍은 서인인데, 동인으로 가 서인의 영수 이이를 비판하면서 선조와 서인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정여립이 외적을 막기위해 대동계를 조직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자 모반 구싱로 삼아 동인이 모함하여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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