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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한태양새227
클래식한태양새22723.05.01

중세 유럽의 교황의 영향은 어디까지 였나요?

중세 유럽에는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권이 약해지고 교황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던데 크리스트교와 교황의 권력과 영향력은 어디까지 힘이 셌던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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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 때 있었던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왕국내의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대립한 사건입니다. 이 대립에 의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교회에 대한 불복종 등을 이유로 파문합니다. 하인리히 4세는 대항하려 했으나 제후들이 파문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황제를 폐위시키기로 결의하면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찾아와 맨발로 바깥에서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 이후의 교황인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해, 황제나 왕은 달'이라는 말로서 당시 교황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크리스트교는 이전의 다신교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 분야만이 아닌 인간의 생활부터 정치, 경제, 학문 분야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정치 분야는 앞서 말한 교황의 권위에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교회는 교황령이라는 거대한 영지의 소유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적극 개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 교회로 들어오는 돈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와 이슬람에 대적하기 위해 십자군을 운영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바치는 돈, 사후에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준다는 면죄부까지 교회로 들어오는 돈은 각국의 왕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종교 기사단들이 쉽게 부를 축적한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대처(결혼을 하는 것)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재산이 분산될 염려가 없다는 뜻입니다.

    학문 분야에 있어서도 교회의 권위는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철학은 종교의 시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학문이란 종교를 떠받들기 위한 존재 가치 외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교리에 반하는 학문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일화입니다.

    실생활에 있어서 종교는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크리스트교 교리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이 교회 조직이 발전해 나가면서 죄의 범위도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길을 가다 이쁜 여자를 보고 탐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참회를 해야 하는데 참회의 방법에는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우선은 매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줌으로서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고 생겨난 것인데 교황은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여 이교도를 죽이는데 힘을 쓴 사람은 죄를 속죄받는다고 하여 십자군 운동을 장려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돈에 의한 속죄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죄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속죄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것은 당시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무지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지옥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사회 각 분야에 걸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교회의 권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고 르네상스 이후 반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조금이나마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