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서는,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지인 아성(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昌圖) 북쪽의 사면성(四面城)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扶餘)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漢代)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