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일본 등 널리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있어서 주자학은 중세까지의 불교를 대신하는 보편사상으로서 수용되었지만 점차 정치사회를 주도하는 이념으로서 정착하였다. 고려 말기 조선 반도에 미친 주자학은 조선왕조 시대에는 압도적인 권위를 수반하여 침투, 풍미하였다. 이퇴계(이황), 이율곡(이이) 등에 대표되는 성정론(性情論)은 더없이 정밀하여 예학의 존중과 더불어 그 예제(禮制)는 양반계층에 수용되어 마치 주자학 일존(一尊)의 분위기였다. 한편 퇴계 이황은 4단 7정론을 펼쳐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초기에 전래되어 주로 오산(五山)의 선승들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독자의 사상적 활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근세초기에도 시대였다. 등원성와(藤原惺窩)를 효시로 임가(林家)의 기초를 구축한 임라산(林羅山)을 비롯한 기문(崎門)이라는 학파의 창시자인 야마자키안사이(山崎闇齊) 또는 이라이하쿠세키(新井白石), 패원익헌(貝原益軒) 등 독창적인 사상가를 배출하여 무가뿐만 아니라 넓은 계층의 사람들의 정신형성에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 관념적, 표층적인 수용에 그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실학, 일본의 고학, 일본학 등도 주자학의 지대한 영향하에 형성된 것은 확실하며 이 시기의 동아시아의 사상세계는 주자학을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주자학이 이 지역의 근대화나 서양 근대사상의 수용에 있어서 상응의 공헌을 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 21세기 정치학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