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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중용주해는 무슨 책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옛날 한국사 역사에 있었던 '중용주해'라는 책은

구체적으로 무슨 책이었나요?

'중용주해'라는 책의 저자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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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용주해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중용을 해석한 책이라고 합니다.

    출처: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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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5.29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용은 중국 송나라시절 주희에 의해 정리된 '대학''논어''맹자''중용'등으로 구성되어있던 사서중의 하나였습니다.

    [ 중용주해 ]는 중국의 사서 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그 곁에 한글 풀이가 함께 있는 책입니다. 이 중용주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책 중 하나로,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실례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성리학 시대에 맞춰 선비들이 달라진 사회 변화에 따라 당면한 현안에 대해 중용이라는 책을 참고에 답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중용주해의 저자는 선조 23년(1590년) 왕의 명령으로 교정청에서 간행한 초간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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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용》은 본래 《예기(禮記)》 49편 가운데 제31편으로 편집되어 있었으나 《대학》과 함께 단행본으로 독립되었고 한대부터 중시되었다. 《중용》은 보통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기록된 최초의 문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이다. 이 책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손자, 자사가 이를 지어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異論)들이 있다. 송대에 이르러 호원(胡瑗)ㆍ정호(程顥) 등 여러 성리학자들이 《중용》에 대한 주해를 지었다.

    정호ㆍ정이(程頤)는 《중용》을 공문(孔門)의 전수심법(傳授心法)으로 중시했다. 이러한 여러 주석서들을 집성한 것이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이다. 여기에서 주자는 《중용》은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하여 도통(道通)의 맥락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논어》 요왈편(堯曰篇)의 ‘윤집궐중(允執厥中)’과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권중’(人心惟危道心惟微 惟精惟一允執厥中)을 《중용》의 유래로 보고 자사가 요순이래로 전해온 도통의 연원을 밝힌 글이라 했다.

    주자는 《중용장구》와 아울러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지어 ‘중용’의 뜻을 천명하고 《논어》ㆍ《맹자》ㆍ《대학》과 함께 사서로 표장(表章)했다. 그러나 주자가 도통의 심법이라고 인거한 ‘대우모’의 내용이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의 것이어서 신빙성이 없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용 [中庸] (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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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용주자혹문은 송나라 주자가 예기 중의 일편을 떼어내 사서의 하나로 엮어 이를 중용이라하고 주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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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세기 조선 학계는 주자 성리학풍이 강화되면서 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류에서 이탈한 학풍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과 평가가 잇따랐습니다. 윤휴는 탈주자학적 학풍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사문난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윤휴가 주자학 일변도인 주류 성리학과 차이를 보인 것은 그가 북인계열 학자들과 교유를 맺음으로써 다양한 사상적 조류의 영향을 받았던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인이었던 윤휴는 주자와 다른 『중용』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로써 노론계열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노론과의 대립은 예송(禮訟)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남인으로 대표되는 윤휴는 예의 적용 문제에서도 제후와 사서의 구분을 명확하게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왕권을 옹호하는 성격을 지녔는데, 이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계열이 제후와 사서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예를 추구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윤휴는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남인이 축출될 때 처형당하였습니다. 윤휴의 문집은 1927년이나 되어서야 간행이 가능했는데, 노론계열의 지속된 집권과 성리학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힌 그에 대한 평가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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