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중후기에 예송논쟁이란 무엇인가요?
조선중후기에 예송논쟁이라는것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조선시대중후기에 예송논쟁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예송논쟁이 일어나배경, 역사적의의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겼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후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서 현종이 즉위합니다.
성리학 도입 이후 고려후기부터 일반 사대부와 평민은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를 따라 관혼상제의 사례로 따랐고, 왕가는 성종 초반까지도 주자가례를 따르다가 성종 대 제정한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했는데 국조오례의 에는 효종처럼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규정이 없었고 이것이 논란의 시발점이 됩니다.
예송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에 대한 계모이자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시가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 시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관련된 두번씩의 상대적인 논쟁으로, 조선후기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47년 효종비 인선왕후의 훙서 시를 비롯한 총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으며,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결정적인 쟁점이 됩니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차라리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해 대립합니다.
당초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되며 효종 상인 기해예송과 인선왕후상인 갑인예송으로 전개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송논쟁은 조선시대의 사건으로서 효종(孝宗, 재위 1649~1659)과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에 따른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服喪) 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2차에 걸친 논쟁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생각했을때 어찌보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정통성에 대한 여러가지 논쟁이였다고 보여집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3_2740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즉위했습니다. 이때 효종의 예법상 효종의 어머니(의붓어머니)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 논의를 지칭하는 것이 예송논쟁입니다. 1차 때는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규례 가지고 일어났고, 2차 때는 며느리 인선왕후에 대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논쟁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은 정말 비상식적이고 쓸모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서인과 남인의 권력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해외에선 벌써 공화정이냐 군주제냐 논쟁이 펼쳐지고, 과학적인 방법을 가지고 논의를 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송은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입니다.
1659년에 기해예송이, 1674년에 갑인예송이 있었으며,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가 행해지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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