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어떤 전투나 업적을 세우셨나요?
홍범도 장군은 어떤 전투나 업적을 세우셨나요?
장군의 지휘력과 전략적인 능력에 대해서 궁금한데, 어떻게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조직화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명 범도(範道)라고도 하며, 호는 여천(汝千)이다.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甲山)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삼수(三水)·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領)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통하여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고,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다시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으며, 1923~24년 무렵부터는 그곳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7년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였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한인 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카자흐스탄 한인 사회에서 독립군 장군 홍범도의 영웅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생전에 이미 고려극장에서 그의 항일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고, 그의 일대기가 《홍범도 일지》로 정리되었다.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 25일,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집 근처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중앙공동묘역으로 옮겨졌다. 1951년 《레닌기치》 기자들을 비롯한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하여 묘를 보수하고,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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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허근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 후 삼수, 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해 북청, 후지령을 중심으로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한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급습하게 해 큰 성과를 거두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 혜산, 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해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70여명을 사살했습니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 19사단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오자 700여명의 독립군을 지휘해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상,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중 최대의 승전이며, 같은해 10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 1 연대장으로 참가해 공을 세웠습니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며 ,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그러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을 통해 많은 독립군이 희생됩니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 1922년 다시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고 1923~24년무렵부터 그곳에서 집단농장을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강의동에 있는 흉상 이전문제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홍범도장군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장군의 삶을 왜곡하고 한쪽면만 바라보면서 1943년 해방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는 세력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홍범도장군의 가장 큰 업적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이는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최고 최대의 전과로 기록에 남을 것입니다. 지금 봉오동지역은 댐이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승리의 함성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봉오동전투는 일본군 157명 사망 200명 중상 100여명의 경상자른 낸 반면 우리 독립군의 피해는 4명 사망뿐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전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10일, 만주에서 일본군과 벌인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거둔 대승리로, 이후의 독립운동에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또한 1920년 10월 25일, 청산리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일본군을 만주에서 축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로, 독립군이 일본군의 군사력에 대등한 전투력을 가진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지휘력과 전략적인 능력을 가진 장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적의 수를 압도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민심을 결집하는 데에도 뛰어났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조직화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강한 사기를 불어넣고, 유능한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부대의 군기를 엄격하게 유지하여, 부대의 질서와 단결을 유지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입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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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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