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글이 창제되면서 조선 건국 초부터 여러 개국공신들이 왕조의 창업을 찬미한 송축가로서 악장이 문자로 정착, 경전과 고전의 번역, 편찬이 활발해지며 세종은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앞서 그 실용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대표적인 악장의 하나인 용비어천가를 정인지, 안지, 권제 등으로 하여금 짓게 했으며 불교찬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간행, 이와 같은 악장체의 시가 중 조선 초에 유행한 한문체의 송축가가 많이 있으나, 차차 자취를 감추고 시조와 가사가 시가문학의 주류가 됩니다.
시조나 가사가 이처럼 확고한 자리를 굳힌 것은 수사에 있어 두 가지 형식이 한국말을 자유로이 구사할수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시조는 간결한 가운데 소박한 취향을 존중하는 유학자들의 서정을 표현하기 알맞았고 가사 또한 현실적이면서 설유적인 유교 이념을 나타내기에 적당했습니다.
사육신의 충의가나 김서의 전진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등에 이르러 내용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이는 작자 자신의 입장과 생활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개성의 문학으로 발전, 조선 전기의 시조문학은 절정에 다다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