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8.14

이릉대전이 실제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나라와 촉과의 전면전인 이릉대전이 일어난 이유가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관우 한사람의 죽음으로 유비가 열이 받아서 일어난것이 맞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비가 황제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의 대신들은 유비를 황제로 올려 한나라의 계통을 승계했다. 221년 한중왕 유비는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소열제(昭烈帝)이다. 역사상에서는 유비의 한나라를 촉한(蜀漢)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손권이 등용한 여몽(呂蒙)이 형주를 기습해 빼앗고 관우를 살해했다. 이로 인하여 촉한과 동오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유비는 즉위한 후,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75만 대군을 모아 동오로 진군했다. 그런데 출발 전에 장비의 부하들이 변절하여 장비를 죽이고 동오로 도망쳤다.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동생들을 잃은 유비는 복수심에 이성을 잃고 대군을 급하게 몰아댔다. 촉한 군대의 선봉장 오반(吳班)과 풍습(馮習)은 무현(巫縣)과 자귀(姊歸)를 재빨리 점령했다.


    그 기세에 겁을 먹은 동오의 군신들은 급히 사신을 보내 유비에게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권이 안달하고 있는데, 대신 감택(闞澤)이 온 가족의 목숨을 내걸고 육손(陸遜)을 군대의 통수로 천거했다. 손권은 진서장군 육손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여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촉나라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이듬해 정월에 유비는 자귀에 이르렀다. 촉나라군은 수륙 두 갈래로 병진하여 이릉(夷陵, 호북성 의창 동남)을 향해 진군하고, 유비의 주력은 효정(猇亭, 호북성 의도 북쪽)에 자리잡았다. 이때 수군도 기슭으로 올라왔다. 그는 장강 남안을 따라 무협에서 이릉에 이르는 7백 리 길에 수십 개의 영채를 연달아 세웠는데 그 성세가 호대하기 그지없었다.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데다가 기세 또한 왕성한 촉나라군을 보고 육손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성을 굳게 지키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오나라 안동 중랑장 손환의 군대가 이도(夷道)에서 촉나라군에게 포위되었다. 손환은 급히 육손에게 구원을 청했다. 육손은 부하 장수들이 구원병을 보내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이도는 성이 튼튼한 데다가 식량이 충분하고 군사들 또한 손환 장군에게 충직하오. 그러므로 너무 우려하지 마시오. 앞으로 내 계책이 실현되면 이도의 포위도 자연히 풀어질 거요.”


    동오의 장수들은 육손이 촉나라군을 공격하지도 않고, 손환을 구원하기도 싫어하는 것을 보고 싸움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고 뒤에서 비난했다. 유비의 군대는 이릉에서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222년 1월부터 6월까지 유비는 줄곧 오나라군과 결전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유비는 오나라군을 유인하려고 오반에게 군사 몇천을 주어 평지에다 영채를 세워 도전하는 양을 보이고, 부근의 산골짜기에 8천 군사를 매복해 놓고 오나라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동오의 장수들은 기회가 왔다며 모두 나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육손은 이를 막았다. “주변 산골짜기에 복병이 있을 것이오. 적들의 꾀에 넘어가지 말고 좀 기다려 봅시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나라군이 싸우러 나오지를 않자 유비는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던 복병을 거둬들였다. 그제야 동오의 장수들은 육손의 말이 옳았다고 감복했다.

    오랫동안의 자세한 관찰을 거쳐 육손은 좋은 대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우선 한 갈래 군대를 파견해 시험적으로 촉나라군의 병영 한 곳을 공격해 보았다. 오나라군은 비록 그 싸움에서 패했지만 이를 통해 육손은 촉나라군을 소탕할 계획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다.


    육손은 병사들에게 마른 풀을 한 단씩 들고 촉나라 군영으로 돌진해 들어가 영채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날 밤따라 바람이 세게 일었다. 촉나라군의 영채들은 모두 길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한 영채에 불이 붙자 그 불길이 곧 다른 영채로 넘어가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렇게 연달아 불이 일어 촉나라군의 영채들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육손은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군의 영채로 쳐들어가 단번에 40여 개의 영채를 빼앗았다. 촉나라군의 장수 장남(張南)과 풍습은 오나라군의 칼에 죽고 살아남은 촉나라군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이도를 포위했던 촉나라군들도 황급히 도망 쳤다.


    유비는 이릉의 서북쪽에 있는 마안산(馬鞍山)으로 퇴각했는데 육손이 대군을 몰아와 산을 포위하고 촉나라군 1만여 명을 섬멸했다. 한밤중에 겹겹의 포위망을 겨우 빠져 나온 유비는 백제성(白帝城, 사천 봉절현 동쪽)으로 퇴각했다. 이번 싸움에서 촉나라군은 거의 전군이 궤멸되는 화를 면치 못했으며, 군수 물자도 모두 빼앗겼다. 역사상에서는 이 전투를 ‘이릉대전’ 혹은 ‘효정대전’이라고 한다.

    출처 : 중국상하오천년사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릉대전은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강동의 손권을 공격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 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강동의 손권을 공격해

    발발한 전쟁입니다.